항목 ID | GC002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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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風水 |
영어공식명칭 | Geomancy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영진,김해인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 땅의 형세와 기운이 인간 삶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과 그러한 믿음에 따른 속설.
[개설]
풍수(風水)라는 말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라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따온 말이다. 이때의 풍은 기후와 풍토를 지칭하고, 수는 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크게 보면 풍수는 죽은 사람이 묻힐 묏자리를 보는 음택풍수(陰宅風水)와 살아 있는 사람이 살 땅을 보는 양택풍수(陽宅風水)로 나누고, 양택풍수는 다시 왕도나 고을 터를 보는 도읍풍수와 집터를 보는 주택풍수로 나눈다.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이름난 양택의 길지로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근령군파(謹寧君派)가 세거하며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누렸던 상당구 낭성면 현암리가 대표적이다. 또 낭성면 호정리에 있는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고가인 청주 과필헌(淸州果必軒)[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역시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음택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 또한 여러 곳이 있으니, 흥덕구에서는 오송읍 연제리의 밀양 박씨(密陽 朴氏) 중시조 묘소, 강내면 궁현리의 단군전(檀君殿) 옆 전주 이씨 근령군파 묘소가 좋은 묏자리로 알려져 있고 상당구에서는 문의면 두모리의 송시열(宋時烈) 증조부 묘소가 명당으로 꼽힌다.
이제 청주 지역에 전하는 전설, 유물·유적, 자연물 등을 통하여 풍수와 관련한 여러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청주의 별명 주성과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풍수학에서 오늘날 청주 도심의 지형은 행주형(行舟形), 즉 배[舟]가 가는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청주는 ‘주성(舟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청주시청 건물도 ‘주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배 모양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인문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철당간(鐵幢竿)[절 입구에 깃발을 세우려고 만든 조형물]은 주성 내 용두사(龍頭寺)에 있는데, 절은 폐사되고 철당간만 남아 있다. 처음 주가 설치될 때 술자(術者)의 말에 따라 건립하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배가 가는 형세이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나오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 龍頭寺址 鐵幢竿)[국보]과 용두사는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철당간은 절 입구에 깃발을 세우려고 만든 조형물이다.
또한 청주 지역에서는 ‘주성’이라는 별명과 철당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국을 순례하던 연등사 주지 혜원이 청주를 지나다 하룻밤을 쉬게 되었는데, 그날 밤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라고 말하였다. 혜원은 아침에 용두사 주지를 만나 꿈 이야기를 전하였다. 꿈 내용을 알 수 없던 혜원은 혼자 우암산에 올라가 초막집을 짓고 청주를 살펴보니 마을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철당간을 세웠다.”
“옛날 청주는 홍수 피해가 잦은 지역이었다. 홍수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점술가를 찾아가 방책을 물었다. 점술가는 마을 모양이 배 모양이니,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돛대 대신에 당간을 세웠다. 그 뒤 홍수를 면하였고 청주를 ‘주성’이라 불렀다.”
이러한 기록 및 전설은 청주 중심지에 있는 빼어난 조형물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과 청주의 지형 지세, 그리고 풍수학에 바탕하여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심천과 우암산의 풍수]
풍수상 청주의 지세는 남쪽이 막히고 북쪽이 트여 무심천이 북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라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읍기(邑基)가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지금의 서원구 수곡동에 남숲을 조성하고 운천동에 북숲, 일명 봉림(鳳林)을 조성하여 비보(裨補)[풍수적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함]하였다. 조선의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청주의 지세가 동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항상 죽음의 기운이 있다. 청주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두었는데 무신년(戊申年)에 이르러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밤에 청주성을 습격하여 당시의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과 영장(營長) 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드디어 청주성을 근거로 반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반란이 청주의 풍수, 즉 무심천의 역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인좌의 반란은 당시의 고질적인 당쟁이 원인인데도 풍수의 탓으로 돌린 것은 조선 시대 풍수 사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한편, 청주의 진산(鎭山)인 당이산은 오늘날 흔히 우암산으로 불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렸고 일설에는 청주대학교 박물관 앞의 작은 연못이 소의 먹이를 담는 구유의 자리라고 한다.
[청주의 산세]
청주 지역의 남동쪽은 소백산맥 가운데에 솟아 있는 속리산에서 시작하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북정맥은 피반령 고개로 솟아 상당구에서 가덕면, 낭성면 추정리 뒷산, 낭성면 지산리를 지나 산성동의 것대산으로 이어진다. 일대의 산들은 높이 500m 안팎으로 험한 산이 없고 경사가 완만하며 부드럽다. 주민들의 성격이 산세의 영향 때문에 원만하고 붙임성이 좋다는 속설도 전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래 이 지역에는 큰 질병이나 천재지변의 재해가 없었다고 한다.
청주 지역에는 산세가 명당인 곳으로 알려진 산도 많이 있다. 팔봉산, 은적산, 저산, 제전봉, 부모산은 모두 산세가 좋아 이름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특히 부모산이 가장 뛰어난 산으로 손꼽히는데, 부모를 이름으로 하는 산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부모산을 중심으로 한 사방 20㎞ 안쪽으로는 큰 질병이나 전쟁으로 말미암은 피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산에서 서쪽 가까운 곳에 제전봉이 있는데, 학이 나래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학상천(飛鶴上天)의 형국을 한 명산이라 한다. 그밖에 문의면의 양성산과 건너편의 작두산, 구녀산도 명산으로 전하여 온다. 작두산은 작천(鵲川), 일명 까치내로 이어져 까치 형상을 이루는데, 작두봉이 까치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