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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615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Catholic
이칭/별칭 서학(西學),천주학(天主學),천주공교(天主公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상원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설]

천주교는 절대자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이다. ‘로마 가톨릭교’라고도 하는데 가톨릭교를 그리스 정교회와 구별하여 이르는 말이다. 로마 가톨릭교는 가톨릭교의 최고위 성직자인 교황을 수장으로 하며, 그리스 정교회는 교황을 승인하지 않으며 교의 및 의식을 중시한다. 교황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교도를 다스리는 교회 행정의 중앙 기관인 교황청이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 교황을 원수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 국가이다.

로마 가톨릭교는 전 세계적으로 3,500여 개의 교구가 있으며, 2021년 말 현재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수는 13억 7800명이다. 청주 지역에는 충청북도 일원[제천·단양을 제외]과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을 관할하는 천주교 청주교구가 있으며, 2021년 말 현재 총 신자 수는 17만 2761명이다.

[명칭의 유래]

가톨릭(Catholic)은 ‘보편적’, ‘일반적’, ‘공변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한 말이다. 가톨릭교회라는 용어는 110년경 안티오키아[현 튀르키예 안타키아]의 주교였던 이냐시오가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편교회[Ecclesia Catholica]’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톨릭이라는 개념은 로마 제국의 국교를 세울 때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모두 통치한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380년 공포한 「가톨릭 신조[De fide catholica]」라는 칙령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후 ‘하나의 보편교회’였던 동·서 교회는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 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로 분리되었다. 동방 교회는 ‘정교회[Orthodox Church]’로 불리게 되었고, 서방 교회는 줄곧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고수하였다. 16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대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의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교[천주교]와 개신교로 갈라졌을 때도 다른 여러 개신교 종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유지하였다.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

천주교는 17세기 초 중국을 왕래하던 관리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천주(天主)를 믿는 종교라는 뜻의 천주교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중국에서는 하느님을 천주라고 하였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처음 전래되었을 당시에는 천주교를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여 서양의 학문, 즉 서학(西學)이라고 하였다. 서학, 천주학(天主學), 천주공교(天主公敎)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천주교로 정착하였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 정조 대부터이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뒤 돌아와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이벽(李檗)과 정약용(丁若鏞), 권일신(權日身) 등에게도 세례를 내려 주었다. 이어 1794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 입국하였고 이후 신자 수가 1만 명에 달하며 천주교의 세가 크게 확장하였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조선의 신분 제도와 전통 풍습을 해친다고 생각하여 모진 박해를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이승훈을 비롯하여 정약전, 홍교만 등 100여 명의 신자와 주문모가 사형에 처하여지면서 기세가 기울었다. 신유박해 이후 살아 남은 신도들이 전국 각지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신앙 생활을 영위하면서 오히려 천주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교회 지도층이 양반 선비층에서 서민 계층으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민중 신앙으로 자리 잡으며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정의 탄압은 더욱 거세져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한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을 당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회 신부인 김대건(金大建)[1822~1846]이 선교 활동 중에 체포되어 1846년 순교하였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한 8,000여 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병인박해는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여 강화도를 침범하는 병인양요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천주교는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으나,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점차 탄압은 수그러졌다.

[청주 지역의 천주교]

청주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였다. 박해를 피하여 은밀히 신앙심을 지켜 오다 1799년 4월 17일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 원시보가 충청병영[현 청주 중앙공원 일원]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하였고, 1800년 당진 진목[현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 배관겸도 충청병영에서 순교하였다. 1802년에는 덕산 비방고지[현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출신 김사집이 충청병영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청주 장터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청주 금봉[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월용리] 출신 전야고보를 비롯한 신자 25명이 남석교(南石橋)에서 처형당하였다.

이후 명맥만 이어 오던 청주 지역 천주교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1896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에 성당이 건립되어 충청북도 최초의 본당이 탄생하였다. 이어 청주를 비롯하여 옥천, 증평, 제천, 충주 등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당시 청주교구는 여러 면에서 아직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서울교구 소속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1953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전교 사업을 전격적으로 위촉함과 동시에 서울대교구 소속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었다. 1958년 6월 23일 서울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지금의 천주교 청주교구인 청주대목구로 승격되었다.

2024년 현재 천주교 청주교구에는 주교 2명[교구장 1명, 은퇴 주교 1명], 사제 196명, 부제 2명 등 성직자 200명과 82개의 본당, 50개의 공소가 소속되어 있으며 2021년 말 현재 총 신자 수는 17만 2761명이다. 교구의 중심이 되는 주교좌성당은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에 있는 내덕동성당이다. 한편 청주 지역 천주교 순교지인 청주 중앙공원에는 2002년 9월 26일 안치된 순교 현양비가 있으며, 옛 청주진영 순교지, 청주 장터와 장대 순교지, 옛 청주옥 신앙 증거 터 등의 순교지에도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 천주교 청주교구(https://www.cdcj.or.kr)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https://cb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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