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994 |
---|---|
한자 | - 峯洞窟 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산57-1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이융조 |
현 소재지 | 두루봉 동굴 유적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산57-1 |
---|---|
성격 | 동굴 유적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에 있는 구석기 시대 유적.
[위치]
두루봉 동굴 유적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산57-1에 있다.
[두루봉 사람의 생활과 문화]
구석기시대의 한 시기에 살았던 두루봉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남긴 여러가지 자료들을 분석하여, 그들의 생활 복원에 기여하고자 하였다[이융조·우종윤, 2006: 이융조·우종윤·하문식, 1996:1999: 이융조·우종윤·하문식·조태섭, 1999]. 두루봉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집자리와 화덕자리는 중요한 고고학 정보를 제공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1) 집자리와 규모-가족수
20여년의 광산활동으로 두루봉유적들이 거의 파괴된 채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전체 유적의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집자리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괴된 유적이기에 아래 항목 중에서 한 개 이상이라도 적용된다면 주거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가운데 2굴[40.48㎡]과 15굴 집자리[약 9.6㎡]는 그 규모를 바탕으로 가족수를 해석한 결과, 2굴은 5명, 15굴은 2~3명으로 계산되어 당시의 가족수를 복원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2) 화덕자리
인류생활사에서 가장 큰 발견과 발명으로 평가되는 불은 사람이 살림을 꾸렸다는 사실을 알려준 분명한 자료인데 두루봉동굴에서도 불의 사용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의 사용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고고학자료인 ‘화덕자리’를 알 수 있으며, 2굴과 흥수굴에서 각각 1기와 15굴 집자리에서 2기를 확인하였다.
ⅰ) 2굴 화덕자리
굴 입구부분에 위치하며, 둘레에 15cm내외의 돌을 약간 불규칙하게 배치하여 타원형태[90×65cm]로 만든 돌돌림 형식에 가까운 화덕자리이며, 굴 안쪽으로 북동쪽부분의 20cm쯤은 트여 있는 모습이다. 화덕자리의 중앙부에는 15cm크기의 편평한 모양의 돌이 1개 놓여져 있고, 이 돌을 중심으로 5cm미만의 약간의 작은 돌이 불규칙하게 분포되고 있으며, 숯조각이 많이 확인되었다.
ⅱ) 15굴 화덕자리
15굴 집자리에서는 출입구 바로 안쪽에 1호 화덕자리가, 70cm 떨어진 집안 북서쪽에 2호 화덕자리가 있다. 1호 화덕자리[55×35cm]는 10~20cm크기의 석회석 막돌을 타원형태로 돌려 놓아 만들었는데 동쪽이 트인 모습이며, 화덕 안에서 뜸숯과 재를 확인하였다. 화덕을 중심으로 재의 분포와 불의 영향을 받은 범위는 80×65cm로 확인된다.
2호 화덕자리[55×40cm]는 10~15cm 크기의 석회석을 깔아 만든 부석식 형태로 평면 타원형으로, 깐돌 사이에는 숯조각과 재가 쌓여 있다. 화덕자리 둘레에서 긁개·자르개 등의 연모가 집중 출토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잡은 짐승의 도살과 조리 등의 문화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화덕자리의 규모가 같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ⅲ) 흥수굴 화덕자리
유적이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Ⅳ층에서 확인된 화덕자리는 15~30cm크기의 막돌 8개가 불규칙하게 평면 타원형[100× 75cm]의 돌돌림형식에 가까운 배열로 보인다. 화덕 안에서 5cm쯤의 두께로 작은 숯조각과 재가 섞인 채로 발굴되었다. 2굴과 흥수굴의 화덕자리는 위치·구조·크기 등에서 서로 많은 유사성이 찾아지며, 화덕자리 주위에 분포한 유물의 현상과 특징, 종류 등으로 보아 취사·난방·연모제작 등의 활동이 화덕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3) 숯 자료와 분석
화덕자리에서 출토된 숯 자료들은 2굴에서 5점이 샘플로 만들어 분석/연구한 결과 소나무 속이 3개, 참나무 속·단풍나무 속이 각각 1개씩이었고, 새굴의 +830cm층에서 출토된 7개의 시료는 오리나무속 6점, 물푸레나무속 1점이었다. 이들 나무시료를 보면 모두 불량한 입지 조건에서 성장한 늙은 나무로 확인되었음에도 높은 열을 얻을 수 있는 목재들이어서 불을 이용하여 연모를 제작하거나, 잡은 짐승을 불에 구워 먹는 일 등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사냥생활-규모와 방법
당시 두루봉 사람들의 생활의 기본은 짐승사냥[수렵, hunting]인데, 이 행위로 잡아 온 많은짐승뼈들이 출토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2굴에서 가장 많은 50마리의 사슴뼈대[큰 꽃사슴, 말사슴]는 모두 사냥으로 잡았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 사냥방법은 2굴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아니한 팔맷돌[bolas-stone]이나 몰이사냥을 하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런데 새굴에서 출토된 아주 거대한 옛 코끼리 상아로 보면 이와는 다르게 집단이 동원되어야만 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냥방법을 연구한 R. LEE 교수[하버드대]의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 쿵족가운데 남자 장정이 적어도 16명 이상이 동원되는 몰이사냥[big game hunting]으로 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사진 4], 우리 두루봉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냥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러한 사냥에는 당시 두루봉에 있었던 여러 동굴유적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또한 이들이 협력하여 큰 짐승[옛 코끼리·쌍코뿔이 등]을 사냥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5) 뼈와 인류행위
강가나 들판에서 살던 구석기인들이 남긴 한데유적[야외유적, open site]에는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석기만이 남게 되나, 동굴 특히 석회암동굴유적에는 그들이 사냥해 온 짐승뼈들이 많은데, 여기에 남겨진 흔적을 분석하는 연구가 유럽에서부터 많이 진행되어 생활복원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루봉 2굴의 뼈 유물을 분석한 박영철 교수[당시 경북대, 연세대 교수 겸 박물관장 역임]가 끝날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나, 떼어낸 자국들을 현미경관찰(SEM)로 밝혀내어, 인류행위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관계학자들이 더욱 발전시켜 짐승뼈에 남겨진 인류행위의 자국을 3가지로 분류하여 밝혀내었다.
① 자른 자국 : 살 바르기, 부위 가르기
② 긁은 자국 : 가죽·뼈막 벗기기, 힘살제거하기
③ 찍은 자국 : 뼈 깨기, 큰 부위 가르기
이러한 방법에 따라 박홍근님은 맨눈 관찰과 정밀한 실체현미경(SEM) 분석을 통해 두루봉동굴[2굴, 새굴, 처녀굴]에서 모두 139점의 인류행위를 확인하여, 인류행위의 흔적을 복원하였다.
6) 꽃가루와 문화행위 그리고 나비날개 비늘
ㄱ. 꽃가루 검사
동굴유적의 자연환경을 밝히기 위한 연구에는 일반적으로 꽃가루[花粉]분석이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에서는 함북 화대군 장덕리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후, 공주 석장리·제천 점말 용굴·연천 전곡리 등의 주요유적의 연구결과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ⅰ) 2굴 꽃가루
두루봉 2굴에서 문화층인 7층에서 꽃가루분석이 실시되어, 나무꽃가루[AP 251개] 가운데 진달래꽃가루가 157점[62.5%]나 검출되어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우선 진달래나무는 산성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이어서 알칼리성 토양인 두루봉 일대에는 자생하여 살 수 없고, 한 곳에서 덩어리진 채로 확인된 것은 사람이 일부러 꽃을 꺾어서 가져다 놓아 집자리인 동굴을 예쁘게 꾸미려는 미의식의 표현행위로 해석되며, 그 시기는 3월 하순쯤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 꽃을 목적에 따라 쓴 가장 오래 된 자료로는 이라크의 샤니다르동굴(Shanidar Cave)에서 약 6만 년 전에 죽은 어린이 무덤주위에 뿌린 8종류의 꽃을 꽃가루분석으로 밝혀 낸 자료이다[A.르롸-구랑 교수, 불란서 파리대]. 이 연구에서 어린아이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꽃을 갖다 놓은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el)’이라고 해석하였는데[R.솔레키 박사], 이보다 훨씬 이른 약 20만 년 전의 두루봉 2굴 사람들은 집을 밝고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꽃을 썼다는 점에서, 이 말은 두루봉 사람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이융조, 1984: 강상준, 1996].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두루봉 2굴의 꽃 문화해석은 세계의 동굴유적연구에 한 모델(model)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하겠다.
ⅱ) 흥수굴 꽃가루
꽃가루 분석결과로 Ⅲㄴ층의 흥수아이(1호) 주변에서 나무꽃가루가 집중 검출되어[924개] 다른 층위[보통 10~30개]보다 월등히 많고, 특히 흥수아이의 양쪽 팔 옆과 몸 중앙부분에서 국화꽃가루가 집중적으로 검출되어, 9~10월에 매장의례로 사용한 것으로 해석되어 주목된다.
ㄴ. 나비날개 비늘
충북대학교 과학교육과의 강상준 교수의 지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박문숙이 새굴과 처녀굴의 꽃가루검사를 진행하던 중, Science에 소개된 A. Leroi-Gourhan 교수의 글을 우연하게 찾아 강상준 교수에게 보고/확인하면서, 발견물이 나비날개임을 알게 되었다.
이 검사로 새굴의 +830cm 층에서 4개, +800cm층에서 3개 그리고 처녀굴의 3개층[+750, +255, +190cm]에서 8개[모두 15개]의 날개비늘을 확인하였고, 여기에 대한 연구결과와 계측치를 학계에 발표하여, 이 사실이 『과학동아』[동아일보사 출판, 16호, 36~39쪽]에 소개되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때의 제목은 ‘두루봉 구석기유적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30만년 전의 나비 비늘 발견’으로 발표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꽃가루분석연구를 세계학계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7) 큰 꽃사슴의 중요성
ㄱ. 우점종의 의미
두루봉동굴에서 밝혀진 많은 짐승화석들 가운데 가장 많은 짐승의 개체 수는 단연 큰 꽃사슴류이다. 2굴에서 확인된 큰 꽃사슴류의 개체수는 33마리[전체 63.5%]이며, 새굴에서는 최소마리수 33마리[62.3%], 처녀굴에서도 최소마리수가 20마리[70%]이며 단연 동물상의 개체수에 우점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사냥하기에 좋은 잇점이 되는 짐슴일 뿐만 아니라, 이 짐승이 갖고 있는 주술적의미[deer cult]를 두루봉동굴유적에서도,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 새굴의 끝 귀퉁이 1㎡안에 뿔을 자른 머리뼈만 13점이 출토된 사실
• 예술품[얼굴모양 예술품과 치레걸이 등]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 사실
• 출토된 처녀굴의 곰 중앙에 큰 꽃사슴 뿔이 정가운데 놓여 있음을 들 수 있다.
ㄴ.사슴뼈로 만든 예술품
두루봉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냥한 사슴류의 뼈를 갖고 만든 의도적인 예술의 행위 작품이 발굴되어 주목된다.
ⅰ) 얼굴예술품
2굴과 9굴에서 두 눈과 입만을 표시한 아주 간략한 수법으로 제작한 예술품이 발굴되었다.
2굴 예술품[27×40×30mm, 50g] 사슴왼쪽 위의 팔뼈의 머릿쪽 부분에 쪼으기방법으로 눈·입을 표현하였는데, 모두 둥글게 나타내려고 했다. 9굴에서 사슴정강이뼈에 새긴 발굴된 사람의 얼굴은 눈을 세모꼴로 새기고 입에는 수염을 새겨서 나타내도록 하였다.
ⅱ) 치레걸이[긴 길이 13.4cm]
새굴의 발굴 계기를 만든 사슴뿔로 만든 치레걸이는 뿔의 돌기부분을 매끈하게 간 것과 그렇지 아니한 한쌍의 뿔로 만든 입을 벌린 짐승모양을 만든 것으로, 신경구멍을 끈으로 연결하여 목걸이로 사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당시 두루봉 사람들의 미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로 주목된다.
8) 사람뼈와 장례문화 - 바로펴묻기
흥수굴에서 출토된 두 개의 사람뼈대[흥수아이 1·2호]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완전한 사람개체들이 발굴되어 크게 주목받는 자료들이다. 더욱이나 이들 자료들이 슬기 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 들이어서 아시아 고인류연구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흥수아이 1호는 바로펴묻기[伸展葬]로 매장한 사람뼈대의 주위에 있는 흙을 꽃가루분석한 결과 엉치뼈 주위에서 국화꽃가루가 덩어리진 채로 확인되어, 이것은 피었던 계절에 있던 흥수아이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신체적인 결함[안짱다리와 충치가 심한 치아]으로 고생하던 대략 5살의 어린 흥수아이1호는 뇌 용적량[1,260cc]이 보면 15살 정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영특한 아이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때, 죽음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일정한 절차에 따라 묻기[매장의례]가 있었고, 이와 함께 국화꽃을 뿌렸던 일종의 장례행위와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고찰된다.
[발견과 조사]
손보기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세대학교 박물관팀이 제첨 점말 용굴을 1973년부터 매년 발굴한 결과가 주요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제천 출신의 강승원 기자[당시 한국일보 주재기자]는 이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1976년 6월, 강승원 기자는 여러 차례 취재차 갔던 대청댐 수몰지역인 문의장터[1일과 6일장]에 “동굴에서 사슴뿔이 나온다”는 촌노들의 이야기를 듣고, 찾은 두루봉 현장에서 수습한 뼈를 충북대학 박물관[당시 조성진 관장]에 연락하였고, 강사로 출강하던 필자[이융조]에게 연락주어 같이 현장을 방문하여 유물을 수습하였다[7월 26일]. 1964년부터 한흥문의광산이 광산활동으로 많은 석회석을 채취하여 두루뭉술하게 생겼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두루봉‘[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시남부락 산 75-1번지, 북위 36° 30´ 35˝, 동경 127° 32´, 21˝]의 2/3이상이 파괴되는 사이 수많은 동굴도 파괴되었고, 결국 그 끝자락에 남아 있는 동굴을 찾은 셈이다.
이 보고를 받은 연세대학교 박물관 손보기 관장은 바로 충북대학교와 공동발굴[1차, 2굴, ’76.8.7~13]을 추진하였고, 충북대학교의 박물관 주임교수로[‘76.11.1] 첫 보임을 받은 필자는 두루봉 2차 발굴에서 10차[’77~‘83]까지 책임을 맡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하여 2굴, 15굴 집자리, 새굴, 처녀굴, 흥수굴 등을 찾아, 많은 짐승뼈와 석기 그리고 사람뼈[흥수아이 1호, 2호] 등 여러 동굴과 구석기 연구자료를 발굴·연구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한편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도 새로이 9굴을 찾아 2차에 걸쳐 발굴·발표하였다.
[의의와 평가]
두루봉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 자료를 바탕으로 고인류학분석을 한 박선주 교수는 1호 흥수아이의 높은 머리의 특징과 현대인의 특징도 같이 갖고 있음을 보고하였으며, 배 부분쪽에 있는 토양을 분석한 꽃가루분석팀[강상준 교수·박문숙 선생]은 많은 국화꽃가루를 검출하여, 국화꽃이 피었던 시기에 죽은 어린이[흥수아이1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최근에는 조태섭 박사[현 연세대학교 교수 겸 박물관장]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두루봉 발굴 30주년기념 국제회의에 발표한 여러 논문들을 『先史와 古代』 25집[’06.12, 한국고대학회]에 발표하였다.
이처럼 두루봉유적은 많은 멸종짐승화석[옛 코끼리·동굴곰·앤더슨 원숭이·큰원숭이·하이에나 크로쿠타·큰 쌍코뿔이 등]의 발굴로 고동물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뼈를 이용하여 만든 뼈연모와 여기에 남아 있는 자른 자국은 인류행위의 복원 연구에도 결정적인 자료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두루봉에서 확인된 집자리 규모의 유적에서 많은 석기와 이들을 사용하여 사냥한 짐승뼈와 옛사람[흥수아이]까지 같이 발굴된 이상적인 구석기 시대의 동굴유적이었으나, 이를 잘 보존하지 못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당시 발굴여건상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