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965
영어공식명칭 Goeok's Filial Piety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서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세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1년 12월 31일 - 「고억의 효」 『청원군 전설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6년 11월 - 「고억의 효」 『청원군지』에 재수록
관련 지명 고억 효자각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서평리지도보기
성격 설화|인물 설화
주요 등장 인물 고억|봉림대군
모티프 유형 효자|의로운 인물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에서 고억의 효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고억의 효」는 조선 후기 청주 출신 양민인 고억(高億)[?~1662]의 효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인물 설화이다.

[채록/수집 상황]

「고억의 효」는 2001년 12월 31일 청원문화원에서 간행한 『청원군 전설지』와 2006년 11월 청원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청원군지』 등에 수록되었다. 당시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전설로 소개되었다. 제보자는 누락되어 있으며 채록 장소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내용]

고억이 열일곱 살 때 형을 대신하여서 요동(遼東)의 역(役)에 나갔다. 당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이 청나라 심양(瀋陽)에 있었는데, 고억은 멀리서 왕자를 모셨다. 조선의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고억은 세자와 대군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다며 통곡하였다. 그러자 봉림대군이 고억에게 고국에 먼저 돌아가라고 하면서 역을 면하게 하여 주었다. 고억은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억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살았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더니 3년을 더 시봉하였다. 또한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통곡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1687년(숙종 13) 고억의 효를 가상히 여겨 조정에서 정문이 내려졌고, 정려비를 세웠다.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서평리고억의 효자각이 남아 있다. 고억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청주목 인물 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문신 이무(李袤)[1600~1684]가 쓴 『과암선생문집(果菴先生文集)』의 ‘효자고억모표’에 나온다. 2015년 4월 17일 고억 효자각(高億 孝子閣)이 청주시 향토유적 제81호로 지정되었다.

[모티프 분석]

「고억의 효」에서는 ‘의로운 인물’, ‘효자’ 등이 주요한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로 이야기의 주인공 고억을 선양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