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939 |
---|---|
이칭/별칭 | 「모찌는 노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민요와 무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세정 |
채록 시기/일시 | 1977년 - 「모찌기 노래」 김의식, 고종운, 이현기, 송환주, 오순득에게 채록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2월 28일 - 「모찌기 노래」 『민담민요지』에 수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4년 2월 20일 - 「모찌기 노래」 『충북민요집』에 수록 |
채록지 | 문박리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문박리 |
채록지 | 강서동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
채록지 | 옥산면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
채록지 | 지동동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지동동 |
채록지 | 부강리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 |
가창권역 | 청주시 - 충청북도 청주시 |
성격 | 노동요 |
토리 | 메나리토리 |
출현음 | 미|라|도|레|미 |
기능 구분 | 농업 노동요 |
형식 구분 | 선후창 |
박자 구조 | 3소박 4박자 |
가창자/시연자 | 김의식|고종운|이현기|송환주|엄순득|오홍열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모를 찌면서 부르던 노동요.
[개설]
「모찌기 노래」는 농업 노동요의 대표적인 「모심기 노래」를 부르기 앞서, 모를 뽑아 내며 부르기 때문에 「모심기 노래」와 더불어 ‘모노래’라고 일컫기도 하며, 「모심기소리」에 포괄되기도 한다. 「모심기 노래」에 비하여 「모찌기 노래」는 드문 편인데, 청주에서는 「모찌기 노래」가 비교적 많이 전승되고 있다. 「모찌는 노래」라고도 전한다.
[채록/수집 상황]
「모찌기 노래」는 1977년 박진, 이종명이 상당구 낭성면 문박리의 주민 김의식[남, 62세], 흥덕구 강서동의 주민 고종운[남, 67세], 흥덕구 강서동의 주민 이현기[남, 78세], 흥덕구 옥산면의 주민 송환주[남, 62세],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의 주민 엄순득[남, 65세]에게 채록한 것이다. 1983년 2월 28일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민담민요지(民譚民謠誌)』에 수록되어 있다. 「모찌기 노래」는 흥덕구 지동동의 주민 오홍열[남, 77세]에게서도 채록되어 1994년 2월 20일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충북민요집(忠北民謠集)』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구성 및 형식]
「모찌기 노래」는 교환창이 주를 이루며, 선후창도 나타난다. 기본 음수율 4·4조가 반복된다.
[내용]
「모찌기 노래」는 일반적인 농업 노동요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고통을 잊고 공동 경제 활동의 즐거움과 권면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일상사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다. 지역별 민요의 특징이 나타난다기보다는 가창자에 따라 사설의 내용이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흥덕구 지동동의 주민 오홍열에게 채록한 「모찌기 노래」는 다음과 같다.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몽쳐 내세 엮어 내세 얼카산이가 몽치세/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이모자리를 메워다가 삼백출빼기로 심어 주게/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첫째로는 나라 상납 둘째로는 부모 봉양/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삼백출짜리로 심어 내세 방 고르게 잘들 심세/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늦어 가네 늦어 가네 담배참이 늦어 가네/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샛밥 먹고 쉬여들 하세 어서 불 낳게 잘들 뭉쳐/ 몽치세 몽치세 에야 못판을 몽치세”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모찌기 노래」를 통하여 과거 가장 중요하였던 생산 활동인 농사와 관련된 공동 경제 활동의 단면을 알 수 있다.
[현황]
「모찌기 노래」는 농업에서의 공동 작업이 점차 사라져 현장에서는 거의 듣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모찌기 노래」를 통하여서는 과거 농업 경제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감정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관심사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