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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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松泉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오창양지길 22-3[양지리 118-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원용준 |
건립 시기/일시 | 1695년 - 송천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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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11년 - 송천서원 사액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송천서원 훼철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2년 - 송천서원 재건 복향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송천서원 복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8년 - 송천서원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4년 - 송천서원 보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4월 17일 - 송천서원 청주시 향토유적 제118호 지정 |
현 소재지 | 송천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오창양지길 22-3[양지리 118-1] |
성격 | 서원 |
양식 | 맞배지붕|목조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2칸 |
관리자 | 안동 김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청주시 향토유적 제118호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양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송천서원(松泉書院)은 1695년(숙종 21)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사렴(金士廉), 최유경(崔有慶), 이정간(李貞幹), 박광우(朴光佑), 이지충(李之忠), 조강(趙綱), 이대건(李大建) 7인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김사렴은 고려 시대에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청주로 은퇴하였다. 당시 조정이나 민간에서 감히 신돈을 비판하지 못하였는데 김사렴이 홀로 직언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송천서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오창양지길 22-3[양지리 118-1]에 있다.
[변천]
송천서원은 1695년 건립되어 1711년(숙종 37) ‘송천(松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이후 이제신(李濟臣), 이인혁(李寅爀), 최석정(崔錫鼎), 남구만(南九萬), 박문수(朴文秀), 이종성(李宗城), 이효석(李孝碩)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광복 후 지방 유림이 복원 계획을 공의하여 1976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고 이후 김여량(金汝亮)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 건물은 1978년 고쳐 짓고 1984년 보수하였다.
[형태]
송천서원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룻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숭모사(崇慕祠)’라는 현판을 걸었다. 마당 앞에 솟을대문의 ‘모현문(慕賢門)’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그 밖의 경내 건물로는 양옆의 협문으로 된 삼문(三門), 4칸의 모현재(慕賢齋), 5칸의 수호사(守護舍), 정문(旌門) 등이 있다.
[현황]
송천서원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20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의의와 평가]
송천서원은 배향 인물의 수가 15위나 되며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비교적 긴 기간에 걸쳐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배향 인물들은 당쟁의 폐해를 혁신하고자 하거나 의병 활동을 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붕당이나 학파와 관련 없이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송천서원은 충청 지역 유교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