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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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錫鼎 |
영어공식명칭 | Choe Seokjeong |
이칭/별칭 | 석만(錫萬),여시(汝時),여화(汝和),존와(存窩),명곡(明谷),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주희 |
출생 시기/일시 | 1646년 - 최석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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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15년 - 최석정 사망 |
출생지 | 최석정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
묘소|단소 | 최석정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
성격 | 문무 관인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최석정(崔錫鼎)[1646~1715]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어릴 적 이름은 최석만(崔錫萬)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 최기남(崔起南)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최후량(崔後亮)이고,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 광주 안씨(廣州 安氏)이다. 형은 최석진(崔錫晉)이고, 동생은 최석항(崔錫恒), 아들은 최창대(崔昌大)이다. 작은아버지 홍문관응교 최후상(崔後尙)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최석정은 1646년(인조 24) 청주에서 태어났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뒤 예조좌랑·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고, 1678년(숙종 4) 응지상소(應旨上疏)[왕이 대답을 구하며 내린 교서(敎書)에 대한 응답으로 올리는 상소]에서 윤휴(尹鑴)를 비난하고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여 삭탈관직당하기도 하였다.
최석정은 이후 한동안 진천(鎭川)에서 우거하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승지·성균관대사성·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외직으로 나가 안동부사·연안부사 등을 지냈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소론의 영수로서 1695년부터 있었던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 때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노론 정치인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최석정은 1697년 우의정에 제수되어 왕세자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01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709년 최석정의 저술인 『예기유편(禮記類編)』이 주자의 설을 무시하였다고 비판을 받아 논란의 중심에 섰으며, 1710년 『예기유편』을 거두어 불태우라는 숙종의 명이 내려졌다.
최석정은 1711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715년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11월 11일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석정의 저술로는 문집인 『명곡집(明谷集)』 36권, 『예기(禮記)』를 분류하고 주석한 『예기유편(禮記類編)』 18권 5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려 뽑은 『좌씨집선(左氏輯選)』 8권, 수학서인 『구수략(九數略)』 4권 등이 있다. 최석정은 할아버지 최명길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陽明學)을 연찬하였고, 전통적인 주자학(朱子學)과는 다른 학설을 제기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두루 재능을 보여 다수의 각자(刻字) 및 비문(碑文)을 썼다.
[묘소]
최석정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석정은 사망한 뒤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 있던 지산서원(芝山書院)에도 배향되었고, 대율리 문정영당(文貞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문정영당은 청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