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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최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328
한자 全州 崔氏
영어공식명칭 Jeonju Cho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108년연표보기 - 최순작 사망
본관 전주 최씨 본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입향지 전주 최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전주 최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지도보기
성씨 시조 최언위
입향 시조 최순작

[정의]

최언위를 시조로 하고 최순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전주 최씨(全州 崔氏)는 최언위(崔彦撝)[868~944]를 시조로 한다. 최언위는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의하여 삼한벽상공신에 제수되고 현재의 전주로 옮겨 살면서 완산백(完山伯)에 봉하여진 인물이다. 시호는 문영(文英)으로 글씨와 글에도 뛰어나 보령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등을 썼다. 전주 최씨는 모두 4계파로 나뉘어 세계를 달리하고 있는데,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을 1세조로 하는 문열공파, 고려 선종 때 문충공(文忠公) 완산부원군 최군옥(崔群玉)의 문충공파, 고려 명종 때 조위총의 난 때 순절한 완산군 최균(崔均)의 사도공파(司徒公派), 고려 후기 완산군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문성공파로 나뉜다. 8세손 최사미(崔思美)는 최재(崔宰)의 큰아들로 벼슬이 봉익대부 예의판서를 지내 후손들이 최사미를 파조로 하여 예의판서공파라 하였다.

[입향 경위]

청주에 세거하는 전주 최씨는 최순작(崔純爵)[?~1108]을 중시조로 하는 문열공계이다. 최순작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시중 겸 상장군을 지내고 완주백에 봉하여졌으니, 이때부터 1세로 한다. 전주 최씨의 청주 입향은 최순작에서 비롯되었다. 최순작은 김해부사로 재직 중 사직하고 서울로 가던 중 청주 북면(北面)에 이르러 좋은 지세와 기름진 땅을 보고 정착하였다. 13세 최기주(崔奇柱)·최원주(崔元柱) 형제에서 많은 자손들이 번성하였는데, 최기주의 자손들이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일대에 세거하면서 대종손의 세계를 이어 가고 있다.

[현황]

북이면 대율리 세거지에 대하여 문중에서 ‘청가(淸家) 전주최씨 종가’라 한다. 최순작이 청주 북면에 터를 마련하였고, 이후 청주 곽씨연담 곽예(郭預)가 전주사록(全州司錄)이라는 벼슬을 지낼 때 6세 최득평(崔得枰)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 사위로 삼아 처가에 거주하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거하였다. 대율리는 대대로 전주 최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전주 최씨는 조선 후기에는 이웃한 용계리 전주 이씨 및 진천 초평의 경주 이씨와 혼맥이 거듭되면서 지역의 대표적인 소론(少論) 가문으로 자리하였다.

[관련 유적]

6세손 최득평의 묘소는 북이면 대율리에 장인인 곽예의 묘소와 나란히 있었으나, 곽예의 묘소는 이후 상당구 명암동으로 이장하였다. 8세손 최유경(崔有慶)은 고려가 망하자 청주 대율리와 진천에 은거하였다가 후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최유경은 한양에 성을 쌓을 때 책임을 맡았고, 태종 때 청백리로 뽑혔다. 세종최유경에게 효자 정문을 내렸으며, 최유경은 전주 예산서원과 청주 송천서원(松泉書院)에서 배향하고 있다. 전주 최씨 문열공파의 족보 간행은 지금까지 10여 차례 이루어졌다. 처음 『융경보(隆慶譜)』가 1567년(명종 22) 간행된 이후 재수(再修)에서 2003년 십수(十修)에 이르렀다. 상·하 2권의 『융경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 문화 류씨의 『가정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간행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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