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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240
한자 乙丑甲繪圖 - 竹林甲稧文書
이칭/별칭 칠현갑회도,죽림갑계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운천동 86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유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686년연표보기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83년 11월 30일연표보기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5년 6월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기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보존 처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소장처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운천동 866]지도보기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의인|이후직|변숙|지성구|신영식|왕린|민광도|민광시
용도 계회도|계문서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을축갑계 회갑 기념 문서.

[개설]

을축갑계(乙丑甲稧)는 을축년인 1625년(인조 3) 태어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살던 11명의 선비들이 1660년(현종 1) 조직한 갑계(甲契)이다. 갑계는 ‘동갑(同甲) 계(契)’라는 의미로, 향촌 사회에서 동년배끼리 강한 동류 의식을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갑계에서는 특별한 만남, 기념일 등을 갑회도(甲會圖)를 제작하여 나누어 가지며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을축갑계 계원 11명 가운데 1명은 계에서 퇴출당하였고 3명은 회갑을 맞기 이전 사망하여, 이후직(李後稷)[1624~1698], 변숙(卞橚)[1625~1695], 지성구(池聖龜)[1625~1702], 신영식(申永植)[1625~1694], 왕린(王潾)[1625~?], 민광도(閔光道)[1625~1713], 민광시(閔光時)[1626~1696] 등 7명만 남았다. 이들은 생원, 진사를 거치지 않은 유학(幼學) 신분으로 향리에 머물며 살던 향반(鄕班)이었다. 이후직은 1624년(갑자년)과 민광시는 1626년(병인년) 태어나 나머지 을축년생들과 1~2년 차이가 있으나 조선 시대 갑계에서는 일반적이었다. 「을축갑회도」와 「죽림갑계문서」는 2015년 6월 죽림영당관리위원회[당시 위원장 민병희]가 청주고인쇄박물관에 기탁하였으며, 2017년 보존 처리를 거쳐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는 1983년 11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

[제작 발급 경위]

「을축갑회도」는 계원들이 회갑을 맞이하던 1686년(숙종 12) 청주 보살사에서 계회를 열고 기념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보살사 화승 의인이 제안하여 그렸다. 「을축갑회도」는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총 2점이 전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에는 7명의 계원과 18명의 자제들이 그려져 있다. 반면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에는 18명의 자제들이 그려져 있지 않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이 보살사 화승 의인(義仁)이 그린 원본이며,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본은 계원 및 후손들이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나중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림갑계문서」는 을축갑회 직후 작성되었으며, 회칙을 기록한 입의(立議)와 그림에 대한 서(序)·발문(跋文) 8편이 수록되어 있다.

[형태]

「을축갑회도」는 세로 141㎝, 가로 114㎝의 크기이다. 전서체(篆書體)로 쓴 제목과 계회 장면, 계회 참석자 명단을 적은 좌목(座目)이 한 화폭에 담긴 축 형태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구성/내용]

「을축갑회도」는 화면 상단에 전서체로 ‘을축갑회도(乙丑甲會圖)’라는 제목을 썼다.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그리고 하단에는 계회 참석자 명단을 적은 좌목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중단에서 우측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건물의 지붕에는 전서체로 ‘보살사암(菩薩寺菴)’을 적어, 계회가 열리는 장소를 알려 주고 있다. 건물 안에 7명의 계원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마루 아래 부분에 계원을 알아볼 수 있도록 계원의 호(號)를 적었다. 조선 시대 향촌계는 사족 집단의 상계(上契)와 평·천민의 하계(下契)로 이루어져 있는데, 「을축갑회도」의 전각 좌우에 하계 계원 2명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계회 참석자의 명단을 적었다.

「죽림갑계문서」에는 상부상조의 취지, 유사(有司)와 실무 담당 규칙, 제향 시기, 제재 사항, 입출원 규칙 등 12가지 항목의 입의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8편의 서·발문에는 갑계의 취지와 「을축갑회도」의 제작 동기 등을 기술하였으며, 1687년 우암 송시열이 발문을 작성하여 주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을축갑회도」는 향촌의 향반들이 제작 주체가 되어 그린 것이다. 17세기 중앙에서 성립된 계회도 제작이 지방으로 파급되었음을 의미하며, 향반들의 계회도에 대한 관심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죽림갑계문서」를 토대로 갑계의 취지와 제작 동기 등을 알 수 있어 17세기 충청북도 향반들의 계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을축갑계 후손들은 「을축갑회도」와 「죽림갑계문서」를 보관하고 친교를 이어 가기 위하여 청주 북일면에 죽림영당을 세웠다. 죽림영당은 1979년 공군 비행장 건설로 철거되어 청원구 내수읍 원통리로 이전하였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0일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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