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145 |
---|---|
한자 | 韓日會談 反對 鬪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수룡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3월 9일 -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 |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3월 26일 - 세광고등학교, 청주여자고등학교 학생 한일회담 반대 가두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3월27일 - 청주 시내 고등학생과 대학생 연합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4월 20일 -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6월 3일 - 청주상업고등학교 학생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6월 4일 - 청주대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학생 연합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4년 6월 5일~1964년 7월 4일 - 정부에서 임시 휴교 조치 실시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2월 25일 - 한일기본조약 합의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3월 20일 -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성토 대회 개최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4월 4일 - 청주 시민 대규모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6월 24일~1965년 6월 26일 - 청주대학교 학생 한일회담 반대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6월 22일 - 한일기본조약 체결 |
전개 시기/일시 | 1965년 12월 18일 - 한일기본조약 비준서 교환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추진에 반발하여 1964년에서 1965년까지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전개된 투쟁.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이 본격화된 1964년부터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된 1965년까지 학생과 야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투쟁이다. 1964년 6월 3일에 절정을 이루어 ’6·3항쟁’이라고도 한다.
[발단]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소요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한일회담을 추진하였다. 대일 협상의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쳐 온 정부는 1964년 3월 한일회담의 타결, 조인, 비준을 1964년 5월까지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또한 일본의 식민 지배에 관한 문제를 한일회담의 부차적인 내용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가 작성한 비밀 합의 각서인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폭로되면서 국민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64년 3월 9일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한일협정 반대 투쟁이 시작되었다.
[경과]
충청북도 청주에서는 1964년 3월 26일 세광고등학교와 청주여자고등학교 학생 1,100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 가두시위에 나섰고, 1964년 3월 27일에는 시내 고등학생과 대학생 6,000명이 연합 시위를 벌였다. 가두시위는 1964년 4월 이후까지 이어졌다. 1964년 4월 20일에는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 1,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1964년 6월 3일에는 청주상업고등학교 학생 1,600여 명이, 1964년 6월 4일에는 청주대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학생 2,800여 명이 연합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정부는 1964년 6월 5일부터 1964년 7월 4일까지 임시 휴교 조치를 하였고, 곧 이어 1964년 7월 5일부터 40일 간의 방학을 강행하였다.
1965년 2월 25일 한일 양국이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하면서 다시금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범국민투쟁위원회는 3월 20일 대규모 성토 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65년 4월 4일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무심천에서 5,000여 명의 청주 시민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65년 6월 말부터는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재개하여, 청주대학교 학생들이 1965년 6월 24일부터 3일 연속으로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결과]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에는 한일협정 인준 반대 투쟁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한일협정은 1965년 12월 18일 도쿄에서 양국의 비준서 교환으로 정식 발효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일회담 반대 투쟁 은 박정희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5·16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비록 한일협정 무산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 학생 주도의 반독재 운동이라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