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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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象賢 文籍 |
영어공식명칭 | Documents of Song S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운천동 86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유림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3년 5월 9일 - 『송상현 문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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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송상현 문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송상현 문적』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
소장처 |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운천동 866] |
성격 | 고문서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송상현 관련 조선 후기 고문서.
[개설]
1592년(선조 25) 동래부사로 재임 중 왜군에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의 업적을 알려 주는 여산 송씨 충렬공파 종중 소유의 문서이다.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교지(敎旨), 치제문(致祭文), 혈선발(血扇跋),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 등 5건 10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조선 정부에 의한 추증 및 사묘 자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송상현은 1551년(명종 6) 충청도 청주목에서 태어나 1576년(선조 9)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예조·공조의 정랑, 군자감을 거쳐 1591년(선조 24)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일본과의 긴장 관계가 전개되자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부산포진이 함락되었고, 송상현은 부산포진이 함락된 다음날인 1592년 4월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형태/서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추증교지의 크기는 가로 105.9㎝, 세로 77.8㎝이다. 충렬공(忠烈公) 시호 추증교지의 크기는 가로 111.5㎝, 세로 59㎝이다. 부인 이씨 정경부인(貞敬夫人) 추증교지의 크기는 가로 105.8㎝, 세로 77.8㎝이다. 숙묘정유(肅廟丁酉) 사묘제문(賜墓祭文)의 크기는 가로 44.3㎝, 세로 56㎝이다. 영묘경오(英廟庚午) 사묘제문의 크기는 가로 54.6㎝, 세로 57.2㎝이다. 영묘어제(英墓御製) 임진사묘제문(壬辰賜墓祭文)의 크기는 가로 80㎝, 세로 53㎝이다. 순묘임진(純墓壬辰) 사동래단제문(賜東萊壇祭文)의 크기는 가로 84.6㎝, 세로 57.8㎝이다. 혈선발(血扇跋)의 크기는 가로 39.3㎝, 세로 67㎝이다. 『천곡수필집』의 크기는 가로 21.3㎝, 세로 27㎝이며,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구성/내용]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를 겪은 노인의 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동래부순절도」에 묘사된 동래성은 북쪽으로 산등성이를 끼고 있으며 평지를 감싼 석성이다. 읍성은 굴곡이 있는 타원형으로 굳게 닫힌 동서남북 성문 주위에 왜군이 포위하고 있으며, 왜군의 일부는 동북쪽 성벽을 넘어 읍성 안으로 진군하고 있다. 읍성 안에는 부사청으로 보이는 관아 건물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그 이외 부속 건물과 초가집이 부사청 주위에 그려져 있다. 송상현은 부사청 앞에서 궁궐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꿇어 앉아 필사항전할 것을 맹세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북문으로 달아나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을 묘사하고 있다. 「동래부순절도」는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모사본[1760년 제작, 보물]과 화원 변곤(卞崑)이 그린 모사본[1834년 제작,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총 2점이 남아 있다.
의정부좌찬성 추증교지는 1741년(영조 17) 정이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던 송상현을 다시 종일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한 교지이다.
충렬공 시호 추증교지는 송상현의 시호를 ‘충렬공’이라 추증할 때의 교지이다. 교지의 말미가 훼손되어 시호와 교지를 내린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숭정대부에 추증된 것으로 미루어 1741년(영조 17)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을 때의 교지와 함께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 이씨 정경부인 추증교지는 1741년(영조 17) 추증된 송상현의 품직(品職)에 따라 부인 이씨에게 정경부인의 품계를 추증한 교지이다. 숙묘정유 사묘제문은 1717년(숙종 43) 숙종이 예조정랑(禮曹正郞) 김윤해(金潤海)를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경오 사묘제문은 1750년(영조 26) 영조가 송상현의 묘소 인근을 지나다가 예조정랑 신일청(申一淸)을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어제 임진사묘제문은 1772년(영조 48) 영조가 예조정랑 변경진(邊景鎭)을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순묘임진 사동래단제문은 1832년(순조 32) 순조가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박제명(朴齊明)을 동래단(東萊壇)으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송상현은 사후 선조, 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에 의하여 아홉 차례 치제문이 내려졌다. 이러한 사정은 송상현 문집인 『천곡집(泉谷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위의 4점이 실물로 전하여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제문을 통하여 송상현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동시에 송상현을 절사(節士)의 이미지로 추숭하여 유교적 가치를 높이 선양하면서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송상현은 동래성 전투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고 / 여러 진들은 단잠에 빠져 있네 /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리가 지극히 무거워서 / 부모 은혜는 외려 가볍다[孤城月暈 列陣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라고 혈서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1756년(영조 31년) 윤봉구(尹鳳九)가 제술(製述)한 것이 혈선발이다.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은 송상현이 명종~선조 당시의 과거 시험 문제[策]와 모범 답안[對]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대책문 선집이다. 송상현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작성하였거나 대책문 연마를 위하여 준비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52장 1책이며, 표지에 ‘천곡수필집’이라 쓰여 있다. 『천곡수필집』은 육경(六卿), 출처(出處), 장략(將略), 도(道), 장(將), 은일(隱逸), 군정(軍政), 과거(科擧), 이적(夷狄), 육폐(六弊), 성현사업(聖賢事業), 역대흥망(歷代興亡), 환시(宦寺), 귀신(鬼神), 천도(天道), 조수솔성오인실성(鳥獸率性吾人失性), 인재(人材) 등 사회 제도, 시사, 성리학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육경만 1568년(선조 1) 대책문이며, 나머지는 1552년(명종 7)부터 1564년(명종 19)까지 과거 급제자들의 대책문이다.
[의의와 평가]
『송상현 문적』은 송상현의 유물 중 지금까지 전하여지는 일괄 유물로 송상현의 업적과 학식,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 자료 및 교육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5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