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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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命俊 |
영어음역 | Yi Myeongj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규근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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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572년 |
몰년 | 1630년 |
본관 | 전의(全義) |
자 | 창기(昌期) |
호 | 잠와(潛窩)|진사재(進思齋) |
아버지 | 이제신(李濟臣) |
어머니 | 목천상씨(木川尙氏) |
추증/추서 | 의정부 좌찬성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진사재(進思齋)이다. 아버지는 청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이며, 어머니는 목천상씨(木川尙氏)로 상붕남(尙鵬南)의 딸이다.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1603년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서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으며, 160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05년에는 호조와 형조좌랑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서원현감(西原縣監)을 역임하였는데, 관정에 물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장마를 예측하고 대비하여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613년의 계축옥사 때에는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되었고, 이후 부수찬에 올랐다. 1624년(인조 2)에는 충청도관찰사를 지냈고, 1625년에는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였으며, 그 뒤 형조참판, 강릉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0년에는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대사간이 되었다가 병조참판을 거쳐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1년에 갑자기 죽자 인조가 애석하게 여기고, 석회와 조묘군을 제급해주기도 하였다. 1648년(인조 26)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7년에 발행된 『청주시지(淸州市誌)』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명준(李命俊)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중앙공원(中央公園)에 현존하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선정비 자체는 현존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선정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측되는 거북대좌가 남아 있다.
[학문과 사상]
이정암(李廷馣), 이항복(李恒福),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술]
『잠와유고(潛窩遺稿)』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