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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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接農民軍 |
영어공식명칭 | Bukjeop Farmers' Army |
이칭/별칭 | 동학농민운동,동학 북접,우금치 전투,손병희,손천민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욱재 |
[정의]
1894년 손병희의 지휘 아래 충청남도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세하여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였던 청주 지역의 동학농민군.
[개설]
북접농민군 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독자적으로 활동한 남접농민군과는 달리 동학 교단의 지시를 받고 무장봉기하여 충청도·경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청주 출신의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충청도 논산[현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세하여 충청도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동학은 1883년 청주목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는데,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된 뒤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충청도까지 포교에 성공하면서 충청도 각지에 동학 조직이 확대되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청주에 거주하고 있던 손천민(孫天民)과 손병희(孫秉熙)는 청주 내 북접농민군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손천민은 청주에서 동학에 처음으로 입도한 인물로, 1893년 남일면에 설치된 봉소도소(奉疎都所)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상소문 작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손병희는 청주 북이면 출신으로, 큰조카인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손병희는 다양한 활약상으로 1888년 교단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최시형의 명으로 충청도·경기도·강원도·경상도 각지에서 봉기한 북접농민군의 통령이 되었다.
[북접농민군의 봉기 및 활동 전개]
남접농민군이 일으킨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는 전라도의 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開南)·김덕명(金德明) 포가 중심이었고, 충청도에서는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에서 호응하였다. 청주의 동학 조직은 북접의 주요 지도자인 손천민 대접주의 포가 중심이라서 1차 봉기에는 합세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경복궁과 경군 병영을 기습하여 궁궐을 장악하고 경군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이 일어난 7월 말 이후 동학교단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 10월 말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무장봉기한 북접농민군은 충청도·경상도·강원도·경기도·황해도 일대에서 지방 관아를 점거하고 무기와 군수미, 군수전을 확보한 후 충청도 보은[현 충청북도 보은군]과 영동 황간[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에 집결하였다. 북접농민군은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민보군의 반격을 받았다. 청주에서도 손천민·서장옥 포가 중심이 되어 청주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청주성 점거는 동학농민군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청주가 농민군의 최종 목표인 서울로 향하는 요지였다는 점과 청주가 충청도 방위의 핵심이었기에 관군 기선 제압을 위하여 필수적이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였다.
청주성을 공격한 북접농민군은 남영병의 반격을 받아 퇴각하였으며, 무심천 변까지 밀려났다. 영동에 집결한 북접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류하여 공주 우금치 공격에 참여하였다.
[결과]
북접농민군 은 우금치 공격이 실패하자 전라도 장수[현 전라북도 장수군]·무주[현 전라북도 무주군]와 충청도 영동을 거쳐 보은으로 돌아왔다가 보은 내 북실[현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에서 일본군과 상주 민보군의 기습을 받아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