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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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韓製絲 |
영어공식명칭 | Namhan Textiles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태재 |
설립연도/일시 | 1949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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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 이도영(李道榮)[1913~1973]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에 있었던 제사업체.
[설립경위]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시(郡是)제사㈜의 조선 분공장(分工場)으로서 대전공장(1926년)에 이어 1929년 청주공장이 설립되었다. 당시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군시제사㈜ 청주공장은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으로서 생사를 생산하였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자본의 제사공장은 품질이 우수한 고격사(高格絲)의 생산에 의해 부가가치를 높여 고이윤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저임금 등의 노동조건을 유지하면서 나이 어린 유년여공(幼年女工)을 중심으로 한 값싼 노동력을 다수 투입하여 중급품을 생산함과 동시에 누에고치가격을 상대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고이익체제를 보장받았던 식민지 수탈의 한 형태였다. 해방 후에는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2월 27일 남한제사㈜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변천]
이후 사직동 제사공장이 문을 닫고, 이 회사 부지에 청주시외버스터미널이 건설되었다. 공장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 100-8 청주공업단지 제1단지로 이전하고 상호를 남한흥산으로 변경, 1978년을 기준으로 생사생산 25억 1천7백만 원, 부산물 2천8백만 원, 수출 490만 7천 달러, 내수 9천2백만 원을 기록하였으나 중국과의 수출경쟁에서 경쟁력을 상실, 1986년 8월 9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 2-1번지 청주공업단지 제3공단 내에 공장을 신축, 이전하여 업종을 전환하여 수정진동자를 생산하던 중 2000년 10월 빛샘정보통신(대표 정상섭)에 18억 4천 5백만 원에 매각되었다.
이로써 오랜 연륜의 남한흥산은 빛샘정보통신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면서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남한제사는 광복 후 청주에서 거의 유일한 기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만큼 이를 토대로 창업주 이도영(李道榮)[1913~1973]은 일신산업, 남한흥산, 홍익개발, 한음파 등의 사업을 확장하였고, 충청일보와 청주문화방송 등 언론사업, 홍익대학교 등 육영사업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였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청주상공회의소 제2·3대 회장(1957~1961), 각급 경제단체의 중앙임원으로 활약하는 등 1950~1960년대 지역경제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주축인 생사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사업의 다각화를 꾀하였으나 창업주의 사후 2세 체제로 이어지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건국초기부터 반세기를 넘게 이어 온 남한제사의 변천 사례에서 기업의 창업보다 유지, 발전이 더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