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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014
한자 姜栢年
영어공식명칭 Gang Baeknyeon
이칭/별칭 숙구(叔久),설봉(雪峯),청월헌(聽月軒),한계(閑溪),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경석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강백년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81년연표보기 - 강백년 사망
사당|배향지 기암서원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진주
대표 관직 우참찬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갈산리에 있는 기암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강백년(姜栢年)[1603~1681]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청월헌(聽月軒)·한계(閑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강인(姜璘)이고,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다. 아버지는 군기시첨정 강주(姜籒)이고, 어머니는 김응서(金應瑞)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부인은 황담(黃湛)의 딸 창원 황씨(昌原 黃氏)이고, 아들은 강선(姜銑)·강현(姜鋧)이다.

[활동 사항]

강백년은 1603년(선조 36)에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46년 부교리 재임 중 강빈(姜嬪)의 옥사가 일어나자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삭직당하였다. 1647년 임금에게 상소하여 전국의 향교를 부흥시켰고, 1648년 대사간 재임 중 다시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여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강백년은 1653년(효종 4) 좌승지를 거쳐 충청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예조판서와 우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강백년은 청풍군수·강릉부사·충청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경기도관찰사 등의 외직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충청도관찰사 재임 중에는 호서에서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여 호서인의 칭송을 받았고, 충청감영을 봉황산 아래의 옛터로 옮기고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강백년은 1681년(숙종 7)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강백년의 저술로는 시문집인 『설봉유고(雪峯遺稿)』 30권 8책이 전한다. 만년에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교양서 『한계만록(閑溪謾錄)』 15권 4책을 편찬하였다.

[묘소]

강백년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강백년은 1690년(숙종 16)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1695년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던 정퇴서원(靜退書院),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용계서원(龍溪書院),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갈산리에 있는 기암서원(機巖書院)에 배향되었다. 기암서원강백년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지역 유림의 공의로 1699년(숙종 25) 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기암리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 후손들이 갈산리에 복원하였다. 2002년에는 후손들이 ‘문정사(文貞祠)’라는 사우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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