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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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八卦 |
영어공식명칭 | Bak Palgwae |
이칭/별칭 | 박학래(朴學來)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애라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6월 3일 - 박팔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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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미국 빅터레코드사에서 박팔괘의 가야금병창 「수궁가」 중 「토끼 화상」을 취입하여 발매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박팔괘 김창환 등과 「백구타령」과 「새타령」 등을 취입하여 발매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7월 21일 - 박팔괘 사망 |
출생지 | 박팔괘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성리 |
묘소 | 박팔괘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장양리 산108 |
성격 | 국악인 |
성별 | 남성 |
본관 | 밀양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국악인.
[개설]
박팔괘(朴八卦)[1882~1940]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박영춘(朴英春)이고,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다. 가야금 연주의 대가로 충청제(忠淸制)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 창시자이다.
[활동 사항]
박팔괘는 1882년 6월 3일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성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이름이 알려져 1900년 무렵 고종 황제의 부름으로 어전 공연을 하였다. 어전 공연에서 가야금 12줄 중에서 4줄이 끊어졌으나 8줄로 연주를 훌륭하게 마치자 고종 황제가 감탄하여 ‘학래(學來)’라는 본명 대신에 ‘팔괘(八卦)’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박팔괘는 1908년 미국 빅터레코드사에서 가야금병창 「수궁가」 중 「토끼 화상」을 취입하여 발매하였고, 1915년에는 당대 최고의 명창인 김창환(金昌煥) 등과 더불어 「백구타령」과 「새타령」 등을 취입하여 발매하였다. 이후 경성에서의 활동을 접고 고향인 북이면 석성리로 돌아와 지동근·백점봉·정해시 등과 공연 활동을 계속하였고, 후학 양성에도 주력하여 이일선·이창수·이계선·박채봉·박상근·성금연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박팔괘는 일제 강점 말기에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40년 7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박팔괘의 묘소는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장양리 산108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