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최응허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423
한자 崔應虛
영어공식명칭 Choe Eungheo
이칭/별칭 공진(拱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주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최응허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37년연표보기 - 최응허 사망
출생지 최응허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대표 경력 형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최응허(崔應虛)[1572~163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공진(拱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할아버지는 최언방(崔彦邦)이다. 아버지는 최완(崔𡸥)이고, 어머니는 노식(盧植)의 딸이다. 부인은 이희(李熹)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아들은 최란선(崔蘭善)이다.

[활동 사항]

최응허는 1572년(선조 5)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에서 태어났다. 160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03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성균관전적·예조좌랑·예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외직으로는 신천군수·경기도도사·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최응허는 1612년(광해군 4) 접반관(接伴官)으로서 명나라 사신 황응양(黃應陽)을 접대하였고, 1621년(광해군 13)에는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형조참판으로 발탁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탄핵되어 유배당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어 위급한 지경에 처하자 1637년(인조 15) 최응허는 행재소로 나아갔는데, 청나라 군대에 막혀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적들을 욕하면서 말을 달려 진입을 시도하다가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1861년(철종 12)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구룡리최응허·최란선 부자를 기리는 경주 최문 충효각이 건립되었다. 송병선(宋秉善)이 지은 최응허의 묘표음기(墓表陰記)에는 최란선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 다른 문헌 근거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