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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당 이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419
한자 師朱堂 李氏
영어공식명칭 Sajudang I Ssi
이칭/별칭 사주당(師朱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주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9년연표보기 - 사주당 이씨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21년연표보기 - 사주당 이씨 사망
출생지 사주당 이씨 출생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지도보기
묘소|단소 사주당 이씨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성격 학자
성별 여성
본관 전주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학자.

[가계]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1739-1821]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사주당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이창식(李昌植)이고, 어머니는 강덕언(姜德彦)의 딸이다. 사주당 이씨는 유한규(柳漢奎)의 네 번째 부인이며, 아들은 유희(柳僖)이다.

[활동 사항]

사주당 이씨는 1739년(영조 15)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이 있어 『가례(家禮)』·『소학(小學)』·여훈서(女訓書) 등을 깊이 공부하였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모시(毛詩)』·『상서(尙書)』와 사서삼경 등도 두루 익혔다. 이로 인하여 명성이 알려져 당대 선비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사주당 이씨는 유한구와 혼인하여서는 부인으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거주하였는데,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녀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주당 이씨는 1821년(순조 21) 사망하였는데, 어머니의 편지와 남편 유한구가 지은 『성리문답(性理問答)』, 사주당 이씨 스스로 베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자신의 저술 가운데 『태교신기(胎敎新記)』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태우도록 하였다.

[학문과 저술]

사주당 이씨의 저술로는 『태교신기』 1책이 전한다. 『태교신기』는 임산부의 태교법을 설명한 것으로, 신작(申綽)이 서문을, 아들 유희가 한글 음을 달고 발문을 썼다. 사주당 이씨는 양명학적 심학(心學)과 유사한 논리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구분하지 않았다. 또한 욕망하는 주체를 인정하여 ‘몸’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그러한 결과로 『태교신기』를 저술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묘소]

사주당 이씨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에 있으며, 용인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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