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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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宇顒 |
영어공식명칭 | Gim Uong |
이칭/별칭 | 직봉포의(直峰布衣),숙부(肅夫),동강(東岡),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주희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은거하였던 문신.
[가계]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종혁(金從革)이고, 할아버지는 김치정(金致精)이다. 아버지는 삼척도호부사 김희삼(金希參)이고, 어머니는 곽인화(郭仁化)의 딸 청주 곽씨(淸州 郭氏)이다. 형은 김우홍(金宇弘)·김우굉(金宇宏)·김우용(金宇容)이다.
[활동 사항]
김우옹은 1540년(중종 35) 성주(星州)에서 태어나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후 홍문관정자·부수찬 등을 역임하였고, 1574년에는 고과에서 중등(中等)을 받아 성균관전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김우옹은 1580년 선위사(宣慰使)로서 일본 사신을 맞이하였고, 직제학·대사간 등을 거쳐 1584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 김우옹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1593년 명나라 장수 원황(袁黃)의 접반사가 되었다가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지고 사퇴했다가 취임하기를 반복하면서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천에 거주하며 소요정(逍遙亭)을 지었고, 1600년 11월에는 청주의 정좌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우옹은 1603년 11월 9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우옹의 저술로는 문집인 『동강선생문집(東岡先生文集)』 21권 10책이 전한다. 김우옹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일원으로, 조식의 심법(心法)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주로 실천적인 측면에서 조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평가된다. 경사(經史)에 걸친 폭넓은 식견으로 경연(經筵)에서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그러한 내용은 『동강선생문집』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묘소]
김우옹의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우옹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1691년(숙종 17)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김우옹은 1616년(광해군 8)에 지어진 함경북도 회령의 오산서원(鰲山書院), 1628년(인조 6)에 지어진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선정리의 회연서원(檜淵書院), 1729년(영조 5)에 지어진 성주군 대가면의 청천서당(晴川書堂),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월오동에 있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 외에도 종성(鍾城)의 동강사(東岡祠), 경성(鏡城)의 함지서원(咸池書院)에 배향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