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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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邯贊 |
영어공식명칭 | Gang Gamchan |
이칭/별칭 | 강은천(姜殷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3길 41[국사리 521-2]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정춘택 |
출생 시기/일시 | 948년 - 강감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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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983년 - 강감찬 과거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011년 - 강감찬 국자좨주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018년 - 강감찬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로 거란군 격파 |
활동 시기/일시 | 1020년 - 강감찬 검교태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030년 - 강감찬 문하시중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031년 - 강감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7년 - 강감찬 충현사에 위패 봉안 |
출생지 | 강감찬 출생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
묘소|단소 | 강감찬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산26-2 |
사당|배향지 | 충현사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3길 41[국사리 521-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금천 |
대표 관직 | 서북면행영도통사|시중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묘소가 있으며 충현사에 위패가 봉안된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강감찬(姜邯贊)[948~1031]의 본관은 금천(衿川)이며, 어릴 적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다.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 강궁진(姜弓珍)이다.
[활동 사항]
강감찬은 948년(정종 3) 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태어났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고,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며 현종을 나주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하였다. 1011년 국자좨주가 되었고, 이후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중추원사·이부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강감찬은 1018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가 되었고, 지방 행정권뿐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할 수 있는 서경유수를 겸하여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이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1018년 1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흥화진(興化鎭)[현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 기병 1만 2000명은 산기슭에 잠복하면서 냇물을 막아 두었다가 일시에 방수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패배한 거란군이 곧 전열을 재정비하여 개경을 침공하려 하였지만, 자주(慈州)[현 평안남도 자산군]와 신은현(新恩縣)[현 황해북도 신계군]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특히 귀주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거란군은 처음 10만 병력 가운데 겨우 수천 명의 인원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현종은 거란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강감찬을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아가서 맞았다. 고려와 거란은 전쟁을 멈추고 화친을 맺었고, 강감찬은 개경에 나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이후 강감찬은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에 오르고 식읍 300호를 하사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에 녹훈되었다. 1020년 검교태부에 오르고 식읍 500호를 하사받은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강감찬은 1030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었고, 1031년 덕종이 즉위하자 검교태사 시중에 오르고 식읍 1,000호를 하사받았으나 곧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강감찬의 저술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묘소]
강감찬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국사리에는 유명한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강감찬의 무덤과 관련한 전설이 구전되어 왔는데, 1963년 강감찬의 후손들이 일대를 수소문하다가 묘지석을 발견하고 1964년 12월에 묘소와 묘역을 정비하였다. 하지만, 지석이 너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까닭에 강감찬 묘에 대한 비정과 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다. 1967년에는 후손들이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3길 41[국사리 521-2]에 충현사(忠顯祠)를 지어 강감찬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감찬은 사망한 뒤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하사받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종 때에는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