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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신한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3259
한자 淑明宸翰帖
영어공식명칭 Letters to Princess Sukmyeong
이칭/별칭 신한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명암동 8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유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세기 - 『숙명신한첩』 편지 작성
편찬 시기/일시 17세기 - 『숙명신한첩』 신한첩으로 성책
발견|발굴 시기/일시 1962년 - 『숙명신한첩』 발견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9년 1월 - 『숙명신한첩』 국립청주박물관 인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10년 1월 4일연표보기 - 신한첩 건 보물 제1269-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7년 10월 31일연표보기 - 신한첩 건에서 『숙명신한첩』으로 명칭 변경, 보물 제1945호로 재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7년 12월 8일연표보기 - 『숙명신한첩』 보물 제1947호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숙명신한첩』 보물로 변경 지정
소장처 국립청주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명암동 87]지도보기
성격 편지
권책 1책 68편
규격 세로 43㎝, 가로 26.5㎝[접은 크기]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가 효종·현종·장렬왕후·인선왕후에게 받은 한글 편지를 엮은 책.

[개설]

신한첩(宸翰帖)은 궁궐[宸]의 편지[翰]을 책으로 엮은 것[帖]이다. 17세기 신한첩으로 효종의 공주인 숙명공주와 숙휘공주의 신한첩 등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숙휘공주의 신한첩만 세간에 알려져 있어, 숙휘공주의 신한첩을 『신한첩』이라 불렀다. 1962년 건국대학교 김일근 교수가 숙명공주의 신한첩을 소장·소개하면서 학계에서는 각각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과 『숙휘신한첩(淑徽宸翰帖)』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2009년 1월 김일근 교수가 타계하면서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숙명신한첩』을 인수하였다. 2010년 1월 4일 보물 제1269-1호로 지정될 당시에는 숙명공주의 신한첩을 ‘신한첩 건(宸翰帖 乾)’, 숙휘공주의 신한첩을 ‘신한첩 곤(宸翰帖 坤)’이라 하였다. 2011년 지질 조사와 섬유 분석을 하였으며, 보존 처리를 거쳐 훼손되어 있던 것을 원래 형태로 복원하는 동시에 별도 액자에 보관되어 있던 효종대왕 어서 1편을 포함하여 하나의 첩으로 재성책하였다. 2017년 10월 31일 서첩의 전래 상황과 수록 자료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각 서첩의 성격과 내용에 맞도록 별도의 명칭을 부여하면서 숙명공주의 신한첩은 기존 ‘신한첩 건(宸翰帖 乾)’을 해제하고 『숙명신한첩』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보물 제1945호로 재지정되었다. 『숙명신한첩』이 2017년 12월 8일 보물 제1947호로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숙명공주[1640~1699]는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셋째 딸이다. 1652년(효종 3) 이조참판 심지원(沈之源)의 아들 심익현(沈益顯)[1641~1683]과 혼인하였다. 심익현과의 사이에서 심정보(沈廷輔)와 심정협(沈廷協)을 두었다. 숙명공주는 1699년(숙종 25) 60세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숙종은 친히 숙명공주의 상사에 가서 애도를 표하기도 하였다.

숙명공주는 생전에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부모인 효종과 인선왕후, 남동생인 현종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이러한 서신을 엮은 책이 『숙명신한첩』이다. 본래 왕실의 친필 문서는 사가에서 보관하지 못하고 베껴 쓴 이후 궁으로 다시 반송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숙명공주의 집안에 왕실의 편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이 편지를 가보로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숙명신한첩』은 서(序)나 발문이 전하지 않아, 편지를 엮어 책으로 펴낸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편지에는 현종의 편지 1편을 제외하고는 수신자와 발신자 및 발신 연월일이 적혀 있지 않다. 그렇지만 편지를 책으로 엮을 당시 각 편지를 발신자별로 구분하여 배열하고, 편명을 적어 넣었기 때문에 발신자와 발신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숙명신한첩』에서는 숙명공주의 동생인 현종의 편지를 ‘현종대왕 어셔[顯宗大王 御書]’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비가 사망한 이후 묘호를 정하기 때문에 현종이 승하한 1674년 이후 편지를 엮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편지는 ‘인선왕후 어셔[仁宣王后 御書]’,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편지는 ‘대왕대비 어셔[大王大妃 御書]’라고 하였다. 인선왕후는 1674년 승하하여 왕비 사후 정하여지는 시호로 편명을 적었으나, 장렬왕후는 시호가 아닌 생전 불리던 대왕대비라 하였다. 즉 『숙명신한첩』은 현종이 사망한 1674년(숙종 1)부터 장렬왕후가 사망한 1688년(숙종 14) 사이에 성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숙휘신한첩』이 순조 2년(1802) 성책된 점을 고려하면 『숙명신한첩』은 숙명공주가 생존하여 있을 때 성책된 점이 특징이다.

[형태/서지]

『숙명신한첩』은 심익현의 후손가에 전하여지고 있다가 1962년 건국대학교 국어국문과 김일근 교수가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부터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하여 표제가 확실하지 않고 편지첩 뒷부분이 낙장되어 있었다. 현재 표제는 김일근 교수가 『숙명신한첩』을 입수하여 써 붙인 것이다. 2011년 무렵 보존 처리 과정에서 결실 부분을 보강하고 습해와 곰팡이로 얼룩져 있던 부분을 제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질과 종이 섬유, 글씨의 경계선 등을 분석하면서 닥나무 재질의 도침이나 아교를 이용하여 표면이 가공된 평균 0.03~0.10㎜의 종이를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숙명신한첩』의 편목명과 순서는 효종대왕 어셔[9편], 현종대왕 어셔[2편], 대왕대비 어셔[2편], 인선왕후 어셔[53편]로,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편지가 가장 많다. 『숙명신한첩』 맨 끝에 편명이 보이지 않은 채 분리되어 있는 1편의 편지가 있는데, 필체와 내용 및 수신자에 대한 상대높임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 편지로 여겨진다. 그리고 숙명공주가 부왕인 효종에게 보낸 편지 1점이 서명만 제외된 채 남아 있다. 특기할 것은 현종의 편지에는 인주색(印朱色)이 생생한 어보(御寶) 세 개가 찍혀 있는 점이다.

[구성/내용]

『숙명신한첩』에 전하는 편지는 모두 68편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 있는 편지가 67건이며, 훼손이 심하여 판독할 수 없는 편지 1건이 있다. 편지는 행수별로 적게는 3행에서부터 많게는 11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독할 수 있는 67건의 편지 중 11편을 제외한 56편이 모두 ‘글월[편지를 보고]’로 시작하고 있어, 주로 숙명공주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임을 알 수 있다. 효종과 현종의 편지는 특별한 용건 때문에 보낸 것도 있지만, 인선왕후의 편지는 안부와 건강을 염려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딸이 시가에서 역할을 잘하도록 당부하거나 음식과 과일 및 소설책 등을 보내기도 하며, 손자들과 함께 궁에서 지낸 즐거움의 표현, 떨어져 있는 그리움 등을 표현하여 왕실 여성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숙명신한첩』을 통하여 ‘ㅿ’의 소멸, ‘‧’의 ‘ㅡ’로 변화 과정 등 17세기 국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하쇼셔’, ‘하소’, ‘하라/하여라’체 등 왕실에서 나이와 직위가 반영된 상대경어법 등을 볼 수 있다.

각 편지의 이미지와 내용, 판독, 번역, 해제 및 관련 연구 성과는 2011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발간한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 숙명신한첩』에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숙명신한첩』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의 『숙휘신한첩』, 오죽헌시립박물관의 명안공주 관련 유물 중 『어필첩(御筆帖)』[보물] 등과 함께 조선 왕실의 한글 어찰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17세기 국어와 서예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어, 관련 분야 연구 자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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