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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409
한자 淸州-西-淸州父母山城
영어의미역 Bumosanseong Fortress, Guardian for the West of Cheongju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지동동 1번지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1월 11일연표보기 - 청주 부모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청주 부모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재지정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건립시기/연도 백제시대
길이 1,135m
소유자 충청북도
관리자 청주시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지동동의 경계에 위치한 부모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자연환경]

청주 부모산성이 위치한 부모산은 청주시의 서쪽에서 가장 높고 크며, 눈에 띄는 산이다. 청주시 비하동지동동의 경계를 이루며,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I.C.)과 중부고속도로의 서청주 나들목 사이에 있는 231.7m 높이의 산이다. 본래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아미산 등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부모산으로 불린다.

부모산의 지질구조는 쥐라기의 반상화강암이 지반을 이루고 있는데, 서남쪽 일정 범위만 섬록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의 주변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美湖川)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부모산은 청주시의 서쪽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사방의 산들을 마주 바라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직선거리 5㎞에 팔봉산, 약 10㎞ 지점에 문의와 경계를 이루는 봉무산, 부강과 경계를 이루는 복두산이 차례로 보인다. 서남쪽 방면으로는 은적산의 저산성과 복두산의 복두산성이 위치에 있다. 남동쪽으로는 봉무산을 거쳐 문의의 작두산성과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청주시내를 건너 우암산(牛岩山)[338m]과 청주 상당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북동쪽으로는 미호천(美湖川) 강안에 있는 평지의 청주 정북동 토성을 지나 강건너 북쪽의 목령산성과 마주본다. 서쪽으로는 조치원 방면의 병마산성 등과 연결된다.

이렇듯 청주 부모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사방의 일정한 범위 이내에 높은 산이 없다. 부모산이 가장 높이 솟아 있어 주변을 바라다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발굴/조사경위]

청주 부모산성에 대한 조사는 청주대학교 이원근 교수가 1982년에 처음 시도하였다. 이 조사는 공식적인 조사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의 조사였다. 공식적인 조사는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1987년에 시행하였는데, 이 조사 역시 개괄적인 조사에 불과하였다. 그 뒤 청주시가 부모산까지 확대함에 따라, 청주시의 의뢰를 받은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1999년에 대규모의 종합적인 지표조사를 단행하였다. 청주 부모산성과 모유정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 역시 1999년의 조사 결과에 의해서였다.

그 뒤 2004년에 중원문화재연구원은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와 북문지 일대를 각각 시굴 및 발굴조사하여 산성의 실체에 다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북문지 발굴조사 결과 내외겹축의 체성벽, 북문지, 수구지, 배수시설 등을 비롯해 인장와, 기와류, 토기류, 확쇠 등 청주 부모산성의 역사적 시기와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청주 부모산성이 위치한 부모산은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 성내에서 발견된 움 유구가 그 흔적이다. 더욱이 인근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무덤유적, 부모산의 기슭에서 발견된 비하동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당시 생활의 중심무대가 부모산과 그 주변지역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주요한 터전이 되어 온 부모산에 산성을 처음 쌓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처음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은 백제이므로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나, 1999년 지표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회백색 연질토기편, 고구려 계통의 붉은 색 격자문 토기편, 신라시대의 화청색 경질토기편이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2004년에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에서는 퇴적토와 뻘층에서 백제와 신라·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북문지에서는 백제 유적지의 특징유물인 “前”자가 새겨진 인장와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청주 부모산성은 백제 때 처음 축조된 이래 통일신라 때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산성의 둘레는 옛 기록에 2,427척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 내측의 길이를 실측한 1,135m와 거의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삼각형 모양에 가까운 성벽은 수평을 유지하며 돌아가거나 굴곡되면서 오르내리는 입체적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현재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바깥 성벽의 하단부 부분은 대체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성벽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밖에서 축조하였는데, 외면은 외측 하단의 기단 밖으로 1~2차에 걸쳐 보축을 하고 내면은 윗쪽에서 겹축하였다. 성벽의 너비는 최소 6.4~7m 내외, 높이는 대략 너비와 같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북문터 성벽은 외측벽 높이 6~10m 이상, 내벽 높이 2~5m 이상, 성벽 너비 7m 내외의 내외 겹축의 견고한 석축으로 축조되었다. 그리고 북문의 규모는 길이 770㎝, 너비 450㎝, 높이 130~180㎝의 현문구조를 갖춘 성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청주 부모산성과 북문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청주 부모산성에는 외부의 적을 공격하기 좋게 축조된 곡성은 없다. 다만, 그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돌출부는 여러 곳이 있다. 구체적인 성문터나 건물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산성 북쪽의 평탄지가 북문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성 주변에는 초소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루성이 3개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5권에는 “청주 서쪽 15리에 둘레 2,427척의 석축산성이 있고 가물 때에 성안에 있는 큰 연못에 기우제를 지내며 지금은 폐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청주 부모산성 안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렇지만 발굴조사 결과 큰 연못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2004년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에 대한 시굴조사를 통해 연못으로 추정되는 부석시설과 석축시설 일부를 확인하였다. 머지않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연못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아직 큰 연못은 찾지 못하였지만, 산성 안에는 여러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母乳井)이란 우물이 있다. 모유정은 작은 할석으로 축조한 직경 3m 정도의 원형 우물인데, 그 아래는 직경 1m 정도이다. 전설과는 달리 수량이 많지 않다.

청주 부모산성이 언제 어떻게 폐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기록으로 보아, 이미 조선시대에는 산성으로서 기능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위에 청주의 서쪽 산성으로서 크게 점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청주 부모산성은 비록 폐성되었을지라도 청주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9년과 2004년의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청주 부모산성은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특징]

청주 부모산성에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으로 있지만, 그 중에서도 청주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등산로는 연화사 길이다. 연화사(蓮華寺)는 비하동 주봉마을 뒤로 20~30분 도보로 오르면 나오는데, 최근 보수공사가 끝난 대웅전과 그 왼쪽으로 1983년에 건립된 미륵존불과 1989년에 세운 연화사사적비가 있다.

연화사는 본래 고려시대의 연월사(蓮月寺)였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후 1920년경에 강원도 천곡사(泉谷寺)의 승 김청암(金淸菴) 화상(和尙)이 복건하였으며 김청암 화상의 꿈에 연화가 만발하였다 하여 연화사(蓮華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통사찰 77호로 지정된 연화사에서 고즈넉한 옛 모습을 찾긴 힘들지만, 이미 고목이 되어 버린 벚나무들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연화사 벚나무들을 벗삼아 오른쪽 동편으로 오르면 평편한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청주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에는 청주 경제성장의 상징인 대농공단이 있고 멀리는 우암산(牛岩山)[338m]과 청주 상당산성을 마주볼 수 있다. 이곳은 산성 건물터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유물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문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청주역이 내려다보이고 그 건너편으로 청원군 옥산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문터는 2002년 발굴을 통해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데, 청주 부모산성에서 산성의 흔적과 축성방식을 가장 완연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북문터에서 서쪽으로 오르면 부모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부에 닿고 옛 산성길을 따라 등산로가 나 있다. 성돌을 발로 밟고 무너진 산성을 보노라면, 저 많은 돌들을 어디에서 가져다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생긴다. 이들 돌은 주로 부모산 지반을 이루고 있는 반상화강암과 서남쪽 일정 범위에 분포한 섬록암인데, 부모산 곳곳에 박혀 있는 큰 바위에서 떼어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밖에 산 아래에서 가져온 냇돌도 약간 사용하였다.

부모산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길은 옛 산성의 정취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 아직 온전히 남아 있는 성벽 일부와 무너진 성, 누군가 세운 돌탑 등은 정겹다. 이곳이 서문터로 추정된다.

돌탑을 따라 다시 위로 오르면, 2000년에 세운 통신시설이 있다. 한국통신 충북본부 충북망 운용국 부모산중계소이다. 통신시설 안에는 「부모산 전설」이 있는 모유정이 있다. 아쉬운 점은 평상시에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기 때문에 모유정은 사전 허락이 없이는 볼 수가 없다.

통신시설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청주의 신흥지역인 가경동(佳景洞)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연화사가 다시 반겨준다.

[관련전설]

청주 부모산성이 위치한 부모산은 크게 두 가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부모산은 원래 아양산(我養山), 악양산(岳陽山), 아미산(俄彌山) 등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부모산으로 부르는 내력은 다음과 같은 전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첫째는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이다. 부모산은 늘 안개가 끼어 있었다.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주민들은 산성 안으로 피신을 하였다. 안개에 덮인 부모산이 주민들을 숨겨주어 몽고군의 노략질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성안으로 피한 주민과 말들이 물이 떨어져 목말라 죽을 위기에 처하였다. 그런데 성안에서 샘물이 솟아났다. 백성들은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 하여 부모산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때이다.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빼앗은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1544~1611]는 여세를 몰라 아양산을 탈환한 뒤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번번이 박춘무에게 패한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아양산을 포위하고 식량보급을 차단했다. 더욱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왜장은 포위를 굳게 해서 식량과 물의 보급을 완전히 막았다.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은 굳게 단결하여 항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름을 넘기자 아사자가 속출했다. 박춘무도 기진하여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박춘무는 쓰러진 채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이때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박춘무를 독려하면서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박춘무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박춘무가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에 모여 있었다. 박춘무는 군사들에게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가 채 뽑히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수량이 많아 식수는 물론 말을 목욕시킬 정도였다.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항전했다. 이 사실을 안 왜병들은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왜병이 물러가자, 박춘무는 목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은 마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재단을 쌓아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부터 아양산을 부모산으로 부르고, 박춘무가 죽음 직전에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모유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휴식처로서의 부모산성]

청주 부모산성은 1990년대 청주시의 도시화에 따라 청주시민의 보금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부모산은 청주시 서쪽의 진산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과 체력 단련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이 청주 부모산성은 시민들에게 청주의 옛 역사와 문화 향기를 느끼게 하는 사적지로 보존 개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청주 부모산성을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지만,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은 연화사 길과 청주가로수길 진약고개에서 시작하는 부모산 서쪽 능선길이다. 하루에도 수십명씩 오르내리는 부모산우암산(牛岩山)[338m] 다음으로 청주시민이 많이 찾는 산이 되었다.

또한 부모산에는 물맛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난 샘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북쪽계곡에 있고 또 하나는 연화사 경내에 있다. 연화사 약수 물은 유명하여 물을 뜨러 오는 시민들이 많다.

[의의와 평가]

청주 부모산성부모산 정상에서 서북·동북·동남으로 뻗은 능선의 상단을 1,135m나 에워싼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그 안에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이 있다. 이곳과 그 주변지역은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청주 서쪽지역민들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을 뿐 아니라,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 그대로 주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한 곳이다. 현재에도 옛 산성의 모습은 되찾지 못하고 있지만, 청주시민들의 사적공원으로, 산책로로, 약수터로 크게 이용되고 있다.

앞으로 더욱더 부모산은 시민들의 역사공간·휴식공간으로 자리잡아나갈 것이다. 그래서 청주의 동쪽은 우암산(牛岩山)[338m], 서쪽은 부모산이 진산 역할을 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명소가 되리라 믿는다. 또한 동쪽의 청주 상당산성과 짝하여 청주 부모산성은 청주의 서쪽 지킴이로 상징화되기를 기대한다.

[영문본문]

Monument No. 121 - Built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it offers a hiking path along the fortress. Yeonhwa temple nearby is famous for its splendid cherry blossom and sweet dew.

(출처 : 청주시청, 「행복한 청주자랑」, 청주시청 문화관광과, 200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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