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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 사지 석조여래입상 및 석조대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207
한자 內谷洞寺址石造如來立像-石造臺座
영어의미역 Stone Buddha Image with Pedestal at the Archeological Site of Temple in Naegok-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종교/불교
유형 유물/불상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 38-1지도보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나경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시기/일시 통일신라 후반|고려 전기
제작지역 청주
높이 175.2㎝
두께 34㎝
너비 54㎝[어깨 폭]
소장처 중부고속도로[하행] 음성휴게소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의 절터에서 출토되었던 불상 및 대좌.

[개설]

1986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흥덕구 내곡동에서 발굴 조사되어 현재는 음성휴게소 유물전시관의 앞마당에 전시되고 있다.

[형태]

흥덕구 내곡동 속칭 부처당골에 있었던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은 없어졌으나 당당한 체구로 비교적 큰 불상이다. 두터운 법의(法衣)에 감싸여 불신(佛身)의 굴곡은 여실히 느낄 수 없지만 당당한 어깨와 가슴, 듬직하게 서 있는 하체(下體) 등에서 중후한 불상(佛像)의 이미지가 잘 표현되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옷 주름의 폭이 넓고 두껍게 조각되었다. 가슴에서 무릎까지는 태조(太彫)의 융기선대(隆起線帶)가 가로로 드리워지고 무릎 이하에서는 지그재그의 옷 주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등쪽에는 의문(衣文)이 조각되지 않았다.

수인(手印)은 왼손은 내려 손바닥을 보이는 여원인(與願印)을 취(結)하였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냈으나 파손이 심하다.

양쪽의 발은 반듯하게 앞으로 내밀었는데 발가락들이 뭉특하다. 이 밑 부분에 가로 34㎝, 세로 20.8㎝, 높이 4㎝ 정도의 촉이 있어서 대좌의 구멍에 끼도록 시설하였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175.2㎝, 어깨 폭 54㎝, 체후(體厚) 34㎝이다.

석불의 옆에는 대좌(臺座)의 상대석(上臺石)이 남아 있었다. 윗면의 중심에 가로 34㎝, 세로 22㎝, 깊이 4㎝의 구멍이 파여 있어 석불 밑 부분의 촉과 정확히 맞도록 한 것으로 보아 이 대좌 위에 불살을 봉안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의 뒷부분은 6㎝ 정도를 절단하여 광배(光背)를 세웠던 듯하며 측면에는 중판연화문(重辦蓮花文)을 조각하였다. 밑면에는 직경 60㎝, 높이 5.2㎝의 둥근 1단(段)을 마련하여 중대석(中臺石)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대석 이하는 모두 없어졌다. 크기는 높이 46㎝, 상경(上俓) 102.4㎝, 하경(下俓)60㎝이다.

[제작경위]

내곡동사지는 옛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절터이다. 그동안 머리가 없어진 석불만이 밭 가운데서 다리 아래 부분이 묻힌 상태로 전해왔었다. 발굴조사 때에 불상의 근처에서 대좌가 수습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이 불상이 서있었던 위치는 조선 말기에 세워진 작은 법당터(法堂址) 정도로 보인다.

원래의 절터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동남쪽 철로변에서 확인된 건물지 주변으로 추정되었다. 건물지는 기단석의 배치로 보아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주변에서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연판문과 해무리문의 수막새기와, 해무리문 암막새기와, 그리고 청자, 백자편이 발견되어 이 불상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을 살펴보면 좀 더 연대가 올라갈 수 있는 고식적인 특징이 두드러져 보인다. 장신(長身)의 길쭉한 체구에 두터운 대의(大衣)를 걸쳐서 몸의 굴곡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는 모습은 마치 삼국시대 석불입상을 보는 듯하다.

특히 몸의 오른쪽으로 치우쳐져서 둥글게 늘어지고 있는 옷주름의 형식이나 시무외 여원인을 결하고 있는 양팔에 걸쳐져서 아래로 늘어지고 있는 대의 자락의 부피감 있는 조각 표현은 마치 충청남도 예산군 사면석불(四面石佛)의 여래입상(如來立像)같은 백제 불상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 불상을 삼국시대 불상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가슴 부분의 내의(內意) 표현이다. 즉 통견으로 입은 내의의 앞자락이 배부분까지 깊게 늘어지고 속에 사선(斜線)으로 입은 내의의 넓은 단과 양 가닥이 아래로 늘어지게 매듭지어진 띠 매듭이 보인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시대가 다소 내려가는 것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같은 통일신라 8세기~9세기경의 부처 입상들이 비교된다.

한편 고려 초반의 여래입상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불신의 형식화나 괴체화된 특징은 찾아지지 않기 때문에, 이 불상의 제작의 시기는 늦어도 고려시대로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통일신라 후반 정도로 추정된다.

불상의 근처에서 발견된 원형의 대좌석도 비슷한 시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넙적한 소문의 연판이 2단으로 둘러져 있는 상대석으로, 통일신라 하대 부처 입상 대좌의 특징을 보인다.

[특징]

내곡동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 후반에 조성된 불상이면서도 삼국시대 백제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는 이 지방 특유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점은 9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호족의 비호 하에 불사가 성행하였던 사실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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