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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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桓 |
영어음역 | Kim H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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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미상 |
몰년 | 1627년 |
본관 | 안동(安東) |
출신지 | 청주 |
아버지 | 김시약(金時若) |
추증/추서 | 첨정(僉正) |
상훈 | 정문(旌門) |
[정의]
조선 후기 정묘호란 때의 충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서제(庶弟)인 김시약(金時若)이 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활동사항]
청주 출신이며, 동생 김규(金糺)와 함께 정묘호란 때 순절한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 아버지 김시약은 1596년(선조 29) 충청도 괴산(槐山)에서 선봉장으로 창의하여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관찰사 천거를 받아 별장에 발탁되었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에는 통영군관(統營軍官)으로 관군과 의병을 통솔하여 창원·옥포 등지에서 왜군 24명을 죽이는 군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후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으로 승진하였고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뒤에 창성부첨절제사(昌城府僉節制使)로 나갔다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성이 함락되자 포로가 되어 죽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기사에 의하면, 김시약은 임진란(壬辰亂) 때에 진주성(晋州城) 안에서 공을 세웠고, 천계(天啓) 정묘년(인조 5)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어 북로(北虜)가 그 성(城)을 핍박하자 힘이 모자라 사로잡혔다.
북로가 두 손바닥을 뚫어 수십 리를 끌고 가며 겁박하여 항복하게 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항복하지 아니하다가 끝내 책살(磔殺)을 당하였고, 그 두 아들도 따라서 또한 군중에서 죽었다. 이에 따라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이 포상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타]
첨정(僉正)에 증직되고,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