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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773
한자 趙憲
영어음역 Jo H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석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추증/추서 영의정
상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
생년 1544년연표보기
몰년 1592년연표보기
본관 배천(白川)
여식(汝式)
중봉(重峰)|도원(陶原)|후율(後栗)
출신지 경기도 김포
아버지 조응지(趙應祉)
시호 문열(文烈)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유학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이며, 호는 중봉(重峰)·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경기도 김포 출생이다. 조응지(趙應祉)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으며,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었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 조좌랑,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노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 그 뒤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종묘서령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은현감으로 나가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1538~1609]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밤치[안읍율치(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므로, 옥천에서 상경,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대사의 승군과 함께,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우세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학문과 사상]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저술]

문집에 『중봉집(重峯集)』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東還封事)』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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