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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594
한자 韓百謙
영어음역 Han Baekgyeo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추증/추서 영의정
생년 1552년연표보기
몰년 1615년연표보기
본관 청주(淸州)
명길(鳴吉)
구암(久菴)
아버지 한효윤(韓孝胤)
어머니 신건(申健)의 녀(女)
아내 구사중(具思仲)의 녀(女)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며, 호는 구암(久菴)이다. 할아버지는 한여필(韓汝弼), 아버지는 한효윤(韓孝胤)이고,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장인은 구사중(具思仲)이다.

[경력]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1543~1620]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천거로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재직 중 병으로 사퇴하였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을 거쳐, 1604년부터 1606년 10월까지 청주목사로 재임하였다. 이어 1607년에는 판결사·호조참의에 서용되었다. 1608년에 선조(宣祖)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호패청이 팔도안무사(八道安撫使)를 정할 때 그가 강원도를 맡게 되었다.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는데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퇴거하여 경전(經典)을 깊이 탐구하였다. 은거생활을 하면서 역학에 해박하다 하여 홍가신(洪可臣), 정구와 함께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활동사항]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하고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을 한 사실이 뒤에 발각되고,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 갔다가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될 때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청주목사로 있을 때에 반시당(返始堂)을 건설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충청도안문어사(忠淸道按問御史) 성진선(成晉善)이 서계(書啓)하기를 “청주 목사(淸州牧使) 한백겸(韓百謙)은 자상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강명(剛明)하게 다스려, 속리(俗吏)의 부화(浮華)스런 작태를 물리쳐버리고 힘써 돈실(敦實)한 정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교(文敎)가 퇴폐된 때를 당하여 홀로 능히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공무에서 물러나온 여가에는 언제나 제생(諸生)과 함께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공용의 남은 재물을 덜어내 경적을 널리 구입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백겸은 정사를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아전들은 두렵게 여기고 백성들은 기뻐하였고, 그가 부임했던 곳에서는 모두 체직된 뒤에도 그를 사모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집에 있으면서는 지극한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고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순리(循吏)라고 칭해졌다.

[학문과 사상]

행촌(杏村) 민순(閔純)에게 사사받았는데, 역학(易學)에 정미하였고 예서(禮書)에 밝았다.

[저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고, 종래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으며, 그 결과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의 저술과 『기전고(箕田考)』가운데 실려있는「기자도(箕子圖)」·「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 밖의 저서로『구암집(久庵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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