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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지계사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451
한자 量田地契事業
영어음역 Yangjeon Jigye Saeop
영어의미역 Land Survey and Registration Project
이칭/별칭 양전사업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양수

[정의]

대한제국 정부에서 1898년 이후 전국토지의 정확한 규모와 소재를 파악하여 그에 의해 합리적인 조세 부과와 예산편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 각종의 개혁 사업을 추진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사업.

[개설]

대한제국 정부가 가장 많은 자금과 인력을 투자하여 수행한 것으로서 대한제국의 시책 중 가장 큰 업적이다.

[목적]

양전사업을 시행한 주요 목적은 전정(田政)을 개혁하여 황실과 국가의 재원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황실재정의 확보는 물론, 각종 근대적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국 토지의 정확한 규모와 소재를 파악하여, 합리적인 조세부과와 예산편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 각종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현황]

대한제국에서는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외국인 측량기사도 초빙하였으며, 1899년부터 양전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양전사업은 당초 전국에 걸쳐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황해도를 제외한 이북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시행되지 못하였고, 이남지역에서는 강원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양전사업이 궁방전(宮房田)과 역둔토(驛屯土)가 많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양지아문(量地衙門)을 통해 토지측량이 시행될 당시 충청북도에서도 청주를 비롯한 충주, 옥천, 진천, 음성, 청풍, 괴산, 보은, 단양, 제천, 회인, 청안, 영춘, 황간, 청산, 연풍 등 대부분의 군·현에서 진행되었다. 공주, 한산, 인천, 홍산, 정산, 청양, 진잠, 연산, 노성, 부여, 석성, 남포, 보령, 전의, 연기, 아산, 천안, 문의, 목천, 오천 등 충청남도의 대부분 지역에서도 또한 실시되었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1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혁파하고,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여 토지측량 조사와 함께 토지소유권 증명을 발급하였다. 이것은 토지측량조사에 만족하지 않고, 토지소유권까지 다시 확인하여 토지소유권 증명을 발급하는 사업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이때의 양전지계사업의 경우 충청북도에서는 거의 해당되는 지역이 없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제국의 지계사업은 근대적 토지소유 증명제도를 도입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제1차의 양전사업, 제2차의 양전지계사업은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달하는 218군에서 시행되어, 토지제도의 근대화에 중요한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개혁사업이 중단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의 양전지계사업 또한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하에 다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나 그것은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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