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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298
한자 郭尙
영어음역 Gwak S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병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034년연표보기
몰년 1106년연표보기
본관 청주(淸州)
원로(元老)
아버지 곽열(郭說)
시호 순현(順顯)

[정의]

고려 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곽열(郭說)의 아들이다. 아들에 곽원(郭垣)과 곽여(郭輿)[1058~1130]가 있다.

[활동사항]

처음에는 청주의 향리였으나 선종(宣宗)을 잠저 시절에 섬기었는데, 선종이 즉위하면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1086년(선종 3)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요나라에 토산물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

선종 대에 궁중 출입이 잦아지면서 권세가 날로 높아졌다. 왕의 교시를 왜곡해 전달한 것이 발각되어 해당 부서에서 탄핵받았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있다. 선종이 위독함에 곽상(郭尙)이 측근에서 시병하였다.

당시 왕자(뒤의 숙종(肅宗))가 침문(寢門)에 이르러 들어가 병을 묻고자 하였으나 곽상이 말하기를 “지금 왕의 병환이 더욱 위독하니 왕자는 만약 부르는 명이 없으면 마땅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왕자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함에 왕이 선왕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여겨 크게 기용하였다.

1101년(숙종 6) 동지추밀원사로서 요나라에 가서 새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어 곽상은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고 나아가 서경유수(西京留守)를 맡게 되었다. 임기가 다하지 않았는데 불러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임명하자 간관(諫官)들이 임기 3년을 마치도록 청했으나 국왕이 듣지 않았다. 이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 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으며, 1103년에 수사공(守司空)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숙종 대에 윤관이 화폐를 사용하자고 건의하였는데 곽상은 우리 풍속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윤관의 주장이 수용되었다.

1106년(예종 원년) 73세로 졸하였으며 시호를 순현(順顯)이라 하였다. 성격이 질박하였고 정직하며 다른 기능이 없고 평생에 가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 집에 아무런 유산이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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