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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297
한자 郭麟
영어음역 Gwak R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병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청주(淸州)
아버지 곽운룡(郭雲龍)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1285년(충렬왕 11) 지공거 설공검(薛公儉) 밑에서 문과에 급제해 문한서(文翰署)에 속하였다. 충직하고 문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았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곽예(郭預)[1232~1286]의 손자이며, 한림원사(翰林院事)를 지낸 곽운룡(郭雲龍)의 아들이다. 아들에 곽지태(郭之泰)가 있고, 손자에 곽충수(郭忠秀)가 있다.

[활동사항]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의 조공을 초유(招諭)케 하기 위하여 첨원(僉院) 홍군상(洪君祥)을 고려에 보내왔는데, 이때 왕은 태복윤(太僕尹) 김유성(金有成)이 외교를 잘한다고 하여 선유사(宣諭使)로 삼았다. 당시 서장관(書狀官)이 결원이었는데 모두 피하려고 하였으나 곽린이 자진해서 서장관이 되었다. 그의 장인이 막으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곽린은 공역서령(供驛署令)으로 승진되어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일본이 두 차례의 정벌(1274년, 1281년)에 감정을 가지고 돌려보내지 않아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일을 민망히 여겨 관직을 주었으며, 또한 그의 충성을 기려 유족에게 청주 추동전(楸洞田)을 하사하였다. 그 자손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손자 곽충수가 추동(북이면 가래올)에 영모정(永慕亭)을 지었는데, 이것은 동쪽을 바라보면서 그의 할아버지를 길이 사모하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곽린의 충절은 이색(李穡)[1328~1396]이 지은 『영모정기(永慕亭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4.06 본문 내용 수정 일본이 왕년의 정벌(1274년, 1281년)에 감정을 가지고 ->일본이 두 차례의 정벌(1274년, 1281년)에 감정을 가지고 ‘왕년’은 인명 태깅에서 해제하고 풀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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