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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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億 |
영어음역 | Go Eok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경준 |
[정의]
조선 후기의 효자.
[활동사항]
청주 출신이며, 양민으로서 효행이 극진하였다. 어머니가 개가를 하였는데, 모친과 이부(異父)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었다. 나이 17세에 형을 대신하여 요동(遼東)의 역(役)에 나갔다. 이때에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임금]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요양에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협상으로 요동에 있던 조선 군사를 돌려보내게 되었다.
고억은 “세자저하와 대군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사배(辭拜)하였더니, 봉림대군이 “고국에 먼저 돌아가라.”고 역을 면제해 주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을 살았다. 그가 어려서 부친상을 당하여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더니 모친 묘소에서 삼년간을 더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 효종(봉림대군)이 승하한 뒤에 통곡하며 그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요동에서 역을 면하게 해준 성은(聖恩)때문이었다. 그는 매년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날이면 향을 피우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687년(숙종 13) 효행이 가상하여 조정에서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였던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 글을 지어 정려비(旌閭碑)를 세웠다. 현재 청원군 강외면 사평리에 효자정려비(孝子旌閭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