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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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最績 |
영어음역 | Yeon Choej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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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 조양(趙暘)의 딸 평양조씨(平壤趙氏) |
시호 | 의민(毅愍) |
추증/추서 | 도승지|이조판서|대제학 |
생년 | 1663년 |
몰년 | 1693년 |
본관 | 곡산(谷山) |
자 | 무경(茂卿) |
호 | 치당(痴堂) |
출신지 | 청주 |
아버지 | 연택로(延宅老) |
어머니 | 유장(柳莊)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이다. 청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연택로(延宅老)이다. 할아버지는 연재희(延再熙), 증조할아버지는 연응복(延應福)이며, 어머니는 유장(柳莊)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조양(趙暘)의 딸 평양조씨이다.
[활동사항]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사헌부 감찰에 올라 올바른 정치와 소신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으나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모진 형신(刑訊)을 당하여 사직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었으나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1693년 숙종(肅宗)이 구언교(求言敎: 국정에 대하여 신하나 사람들의 직언을 구하는 교시)를 내리자 이에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 비는 상소문을 올려,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효자로 이름 높아 정려(旌閭)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권상하(權尙夏)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저술]
『치당유고(痴堂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그가 죽은 지 2년 후 순무사(巡撫使)가 그의 효행을 듣고 조정에 알려 정려되었다. 1738년(영조 14)에는 모든 것이 복위되고 자손까지 녹용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1779년(정조 3)에는 기사환국 당시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두 신하의 죽음을 힘껏 구제하고 형장 아래서도 한마디 말도 바꾸지 않았던 충절(忠節)이 인정되어 특별히 증시(贈諡)하게 하였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충신문이 세워지고 그 뒤 1747년 이조판서 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그를 추모하는 충효양전문(忠孝兩全門)이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慕忠洞)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