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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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Han Yonghw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조선 영조(英祖)~정조대의 문신으로 청주목사를 지냈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예지(禮之), 호는 광암(廣庵)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으로 증직된 한후유(韓後裕)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익수(閔翼洙)의 딸이다. 부인은 김치만(金致萬)의 딸인 정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한상이(韓象履)이고, 2남은 한경이(韓景履)인데 한용구(韓用龜)에게 입양 되었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청주목사 재임시절 보예고(保隷庫)를 신설하였으며, 1779년(정조 3) 진휼을 베풀었다.
한용화는 평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독실하여 항상 저녁에 시중을 들고 나서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코고는 소리를 들은 뒤에 물러나왔다. 상(喪)을 당하였을 때 나이 60이 되었으나 항시 상복을 벗지 않았다. 어느날 제물을 늦게 올리자 집안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땔 나무가 없어 그랬던 것을 알고 그 뒤로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불을 때지 않았고, 5년 동안을 부모상을 치루면서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1793년 한확(韓確)의 신도비 대석(臺石)을 보수할 때 여러 일가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이 사업을 완수하였고,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시조인 한란의 청주 산소에 참배하고 그 재실을 보니 기둥이 기우러지고 담장과 뜰이 허물어졌으며 또 건축한지가 100년이 지난지라 몹시 노후(老朽)되었음을 보고 곧 자기 녹봉에서 출연(出捐)하며 일가들과 힘을 모아 두해를 걸쳐서 공사를 마치고 그 재사(齋舍)의 이름을 세일재(歲一齋)라 하는 등 조상의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남면 창리 선영(先塋)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