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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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裕身 |
영어음역 | Yi Yus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자는 덕중(德仲)이다. 아버지는 이준상(李寯相)이며, 어머니는 김이명(金以鳴)의 딸 강릉(江陵)김씨이다. 할아버지는 이지성(李之星)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초기(李楚奇)이다. 부인은 한경(韓熲)의 딸 청주(淸州)한씨이다.
[활동사항]
1723년(경종 3) 성균관에서 수업할 당시 임금이 친히 황감(黃柑)을 하사하고 시사(試士)한 자리에서 수석으로 뽑혔을 정도로 수재였다. 그 후 1725년(영조 1)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4등으로 합격하여 출사하였다.
1730년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에 감시관(監試官)이 갖추어지지 않아 과거시험이 유체(留滯)되었다는 이유로 대사간 성덕윤(成德潤)과 함께 죄를 입어 진해 현감(鎭海縣監)으로 출보(黜補)되었다. 그러나 곧 지평으로 복귀하여 대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청주목사로 부임하였을 당시 많은 치적을 쌓았는데 1736년부터 1737년에 공북루(拱北樓)를 중수하고, 새로이 지소청(紙所廳)을 신설하였다. 이러한 치적의 공으로 청주에 비가 세워졌다.
1737년에는 사헌부 장령(掌令),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으며, 그 후 영조(英祖)를 보필하는 승지가 되었다. 1743년에는 양평군(陽平君) 장(檣)이 진하겸사은정사로 북경에 파견될 때 서장관으로 보필하였다.
1746년에는 폐사군(廢四郡)의 지도(地圖)를 올리고 다시 사군을 설치할 것을 청하는 등 영토 확장과 북방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다시 외직인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승지로 복귀하였고, 1749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그 후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