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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501
한자 李時發
영어음역 Yi Sibal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석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추증/추서 영의정
생년 1569년연표보기
몰년 1626년연표보기
본관 경주(慶州)
양구(養久)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 이대건(李大建)
어머니 김도(金燾)의 딸
시호 충익(忠翼)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대건(李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도(金燾)의 딸이다.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산골짜기에 피신시키고 의병장 박춘무(朴春茂)[1544~1611]에 종군하여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행궁(行宮)에 나아가 환도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상소하였다.

낙상지(駱尙志)가 인솔하는 명나라 군대가 경주에 주둔하여 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전적·정언·사서를 역임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에 재직 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여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현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토벌하는 데 전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가 사직하고 청주 후영리(後穎里)로 하향하여 산수를 즐기며 스스로 후영어은(後潁漁隱)이라 불렀다. 그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보급을 관장하였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光海君)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고향의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함으로써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이 후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학문과 사상]

이덕윤(李德胤)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저술]

저서로는 『주변록(籌邊錄)』과『벽오유고(碧梧遺稿)』 등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4.05 본문 내용 수정 1) 청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산골짜기 피신시키고 ->청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산골짜기에 피신시키고 2)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부탁하고 사직하였다.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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