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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231
한자 朴致和
영어음역 Park Chihwa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어머니 이협진(李秊進)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아내 최동훤(崔東萱)의 딸 화순최씨(和順崔氏)
생년 1680년연표보기
몰년 1767년연표보기
본관 밀양(密陽)
초명 박치원(朴致遠)
사이(士邇)
읍건재(泣愆齋)|손재(巽齋)
출신지 청주
아버지 박수기(朴守基)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청주의 세거대족(世居大族) 출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초명(初名)은 치원(致遠), 자는 사이(士邇), 호는 읍건재(泣愆齋)·손재(巽齋)이다. 기묘사림으로 활약하던 박훈(朴薰)[1484~1540]의 7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박정표(朴廷彪)[1618~1662], 할아버지는 박세익(朴世翼)이다. 아버지는 감역관(監役官) 박수기(朴守基)이며, 어머니는 생원 이협진(李秊進)의 딸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부인은 최동훤(崔東萱)의 딸 화순최씨(和順崔氏)이다.

[활동사항]

1708년(숙종 3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예조·병조의 좌랑 등을 거쳐 양성현감(陽城縣監)을 지냈다. 경종이 세자가 없고 병이 많아 노론측에서 왕세제(王世弟)의 책봉을 서둘렀다. 특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주축이 되어 왕의 동생인 연잉군(延艀君)[뒤의 영조(英祖)]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소론파를 이끌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사간 유봉휘(柳鳳輝) 등이 반대 소를 올려 노소론이 극한 대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박치화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서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상소했으나 조태구·최석항(崔錫恒) 등의 방해로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를 기화로 조태구어유룡(魚有龍)과 함께 환관들과 내통한 것을 들어 처벌을 청하였고, 결국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의해 잡혀 들어가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언관의 권리를 주장해 왕이 석방하려 했으나, 이어 터진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이 실각하자 결국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곧 유배에서 풀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사간을 역임하였다. 이 때 그의 계청(啓請)으로 노론들이 대부분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있을 때는 논어를 강독하면서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예를 들어 영조의 탕평책이 시비를 흐린다는 풍자로 간(諫)하기도 하였다. 뒤에 병조참의로 있다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충주목사로 내려갔다. 이 때 공해(公廨)와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관청 곡식을 채워서 어려움에 대비하였다.

1728년 사간으로 있을 때, 소론 일파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탕평책을 시행하는 왕의 뜻을 거슬러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754년 유배에서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 원로 문신(文臣)을 예우(禮遇)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갔다. 이듬 해 영조에게 언로를 넓힐 것을 청했고, 1759년에는 왕세자(王世子 : 뒤의 정조)의 대리가 지나치다고 상소하였다.

1764년 왕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영조의 친필이 하사되었다. 1767년 사포서제조(司圃署提調)를 겸하였다. 성품이 강개(慷慨)해 직언을 잘하였기에 세인이 삼간신(三諫臣)이라 칭송하였다.

[저술]

『설계수록(雪溪隨錄)』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4.04 2011년 현행화 사업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예를 들어 -><인명>장저(長沮)</인명>와 <인명>걸닉(桀溺)</인명>의 예를 들어 ->인명으로 태깅하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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