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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054
한자 弓裔
영어음역 Gung Ye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집필자 이병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미상
몰년 918년연표보기
법명 선종(善宗)

[정의]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자이자 왕.

[가계]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이며, 일설에는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장차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믿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해 사자가 그 집에 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다락 밑에 숨어 있던 유비(乳婢)가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해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리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뒤 궁예(弓裔)는 유모에 의해 키워졌다. 뒤에 강원도 영월의 세달사(世達寺)에 출가하여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활동사항]

궁예와 청주인은 특별한 연고관계를 맺고 있었다. 궁예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앙정쟁에 의해 지방에 숨어살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청주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궁예는 10여 세에 이르러 신분이 탄로 나자 청주를 떠나 강원도 영월의 세달사로 가서 승려가 되었다.

진성여왕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지자 정치적 야심을 갖고 출신기반인 청주 인근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청주 출신 호족인 죽주적(竹州賊)〉 기훤에게 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다. 그후 북원적(北原賊) 양길(梁吉)에게 귀부하였다. 세력이 커지면서 사실상 궁예는 청주를 비롯하여 죽산, 괴양 등지를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양길은 충주, 원주 등지를 지배하였다.

개성에서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자신의 측근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이에 904년 청주인호 1천을 철원성에 옮겨 도읍을 설치케 하였다. 자신의 출신기반인 청주인을 철원으로 옮겨 군사적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912년 아지태(阿志泰) 사건이 있었다. 청주인 아지태가 같은 청주사람인 입전(笠全),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을 모함하였는데 이들간의 분쟁을 유사(有司)에서도 수년간 해결하지 못하였다. 왕건(王建)이 적극 개입해 아지태를 처벌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친궁예세력이었던 아지태를 처벌함으로써 그와 대립하고 있던 입전, 신방, 관서 등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재경세력이 친궁예파와 친왕건파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인들 가운데는 친궁예파의 인물이 많았던 것 같다.

918년 왕건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태조(太祖)로 즉위하자 청주 사람 대부분이 이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청주재지세력이 반발하였고, 재경 청주세력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건이 즉위하자 9월에 청주 출신의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동향출신의 배총규(裵悤規)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며, 10월에는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가 모반을 꾀하였다.

왕건 즉위에 불만을 품은 친궁예세력의 반발이었다. 재경청주세력만이 아니라 청주의 토착세력 가운데 친궁예세력도 반발하였다. 이처럼 청주는 궁예와 정치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은 지역이었다.

[의의와 평가]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성격이 포악하며 의심이 많고, 매우 미신적인 불교를 신봉하였다고 보았다. 출생과정에서 신라왕실의 거부를 당하였기에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커서 신라사회를 파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삼국의 하나인 태봉을 건국할 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소유한 인물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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