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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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 表忠寺 松雲大師 奮忠紓 難錄 木板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구천리 2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제작 시기/일시 | 1739년 -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책판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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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90년 1월 16일 -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책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8년 12월 20일 -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책판에서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으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6월 29일 -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장처 | 표충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구천리 23] |
원소재지 | 표충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구천리 23] |
성격 | 책판 |
재질 | 목조 |
크기(높이,길이,너비) | 20.6㎝[목판부 세로]|31.6㎝[목판부 가로] |
소유자 | 표충사 |
관리자 | 표충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표충사에 있는 사명당 유정의 활약상을 담은 실기를 판각한 책판.
[개설]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목판(密陽表忠寺松雲大師奮忠紓難錄木板)은 1739년(영조 15) 표충사에서 간행된 『송운대사 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의 목판이다. 송운(松雲)은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의 또 다른 법호(法號)이다. 5대 법손인 태허(太虛) 남붕(南鵬)의 주도로 표충사의 중창과 사명당에 대한 현창이 이루어지던 영조 연간에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이 편집한 내용을 표충사에서 판각하였다.
1990년 1월 16일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책판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형태]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의 수는 총 47매이다. ‘상지십오년 기미칠월 밀주 영취산 표충사 개간(上之十五年己未七月密州靈鷲山表忠寺 開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있어서 1739년 표충사에서 판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목판의 전면과 후면에 각각 1장씩 내용이 판각되어 있는 형태이며, 마구리는 별도로 제작하여 판목의 장부에 관통시켜 결구하였다. 마구리를 제외한 목판의 전체 크기는 세로 20.6㎝, 가로 31.6㎝ 내외이다.
[특징]
본래 제자 남붕이 보관하고 있던 사명당의 글에는 ‘골계도(滑稽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서문을 쓴 청사(淸沙) 김재로(金在魯)가 남붕으로부터 글을 받아 본 후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으로 제목을 고쳤다. 우의정(右議政) 장밀헌(藏密軒) 송인명(宋寅明)과 이조참판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가 발문을 지었다. 문장 교정과 편집을 청탁 받은 신유한(申維翰)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밀양의 옛 기록인 『밀주지(密州誌)』 등에 수록된 사명당 관련 기록과 사적(事蹟)들을 추가하면서 본인의 단평과 발문을 실어 편집을 마쳤다.
책판에 수록된 내용은 임진왜란 때 사명당이 여러 차례 울산 서생포 왜성(倭城)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진영을 오고 가며, 정황을 기록한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정세 보고 내용을 담은 「별고적정(別告敵情)」과 조정에 올린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 등의 상소를 비롯하여, 사명당의 행적에 관한 내용과 여러 문인 및 관료, 당시 일본의 승려들과 교류하며 지은 글 등이 함께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은 임진왜란과 사명당에 관한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1612년 간행된 『사명당집』에서 빠진 시문과 사적을 모아 간행되었다는 사실과 유학자인 중앙 관료들이 서문과 발문 쓰고, 편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