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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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음역 | Seonsa |
영어의미역 | Prehistoric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이상균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전개된 역사 이전의 시대.
[개설]
선사 시대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은 시기의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된다. 이는 덴마크의 톰센(C. J. Thomsen)이 제안한 3시대 체계[Three age system]에 따라 인류가 생산한 유물을 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의 3대 시기로 구분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한편, 문자가 존재하는 삼국 시대 이후의 시기를 역사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석기 시대]
1.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에는 춥고 건조한 시기가 반복되는 빙기와 간빙기가 지속되었다. 인류의 조상 오스트랄로피데쿠스는 500만 년 전에 출현하였다.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한 호모 하비리스, 직립 보행과 불을 사용한 호모 에렉투스가 전기 구석기 시대에 거주하였다. 이 시기의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찍개, 가로날도끼, 망치돌 등이 있었다.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면서 중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4만 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는 현대인과 동일한 신체로 진화하였다. 이 시기에는 2차 가공한 돌날[blade]과 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좀돌날[micro blade]의 석기를 제작하였다.
고창에서의 구석기 유적은 고수면 부곡리 증산에서 조사되었으며, 5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과 석기 제작소, 유물로는 주먹 도끼, 양날 찍개, 긁개 등이 출토되었다.
2.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우리나라에서는 1만 년 전부터 3000년 전의 시기를 말한다.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되어 수림대의 변화와 함께 동물상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낙엽수림, 조엽수림의 울창한 숲에는 중·소형 동물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울창한 삼림에서 나무 열매를 채집하여 가공하는 기술을 발달시켰고, 음식물을 저장하고 익히기 위해 토기도 만들어졌다.
정주 생활과 함께 수렵·채집을 위해 많은 도구들이 창출되었고, 행동이 빠른 동물들을 포획하기 위해 활과 화살도 발명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바다의 자원도 이용하게 되었다. 결합 낚시 바늘, 돌작살 등 각종 어로구를 이용해 어로에 종사하고 조개 채집도 성행하였다. 고창에서의 신석기 유적은 아직 발견된 예가 없지만, 인접한 부안의 해안가 조개더미에서는 빗살 무늬 토기가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 고창에서도 추후에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는 신석기 시대에 비해 해수면이 저하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에 저습지가 생겨나 벼농사에 적합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대륙에서 벼농사의 기술이 전래되었으며, 농경 도구가 많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동기의 주조술이 전래되어 각종 무기류, 장신구류 등이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농사를 짓고 집단 거주를 위해 많은 나무가 필요하게 되고, 나무의 벌채로 인하여 대규모적인 자연의 개변이 일어난다.
청동기 시기에 비로소 전쟁이 시작되며, 토기는 기존의 빗살 무늬 토기와 달리 민무늬 토기가 만들어졌다. 또한 방직 기술이 개발되어 사계절의 패션이 가능하게 되었고, 제염이 일반화되는 등 많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묘제는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 고인돌[지석묘]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특히 고창에는 고인돌이 많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죽림리, 상갑리, 운곡리, 상금리, 계산리, 삼인리, 암치리 고인돌군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고창 지석묘군은 강화도와 전라남도 화순의 지석묘군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의 생활 유적인 주거지는 송국리형 주거지이며 예지리, 산정리, 죽림리, 성남리Ⅳ, 삼인리, 우평리, 교운리, 남산리, 석교리Ⅱ, 오호리 신지매, 율계리 유적 등에서 조사되었다.
[철기 시대]
철기 시대에는 청동기가 점차 소멸되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발달한다. 철제 농구도 많아져 농업 생산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또한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이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보듯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인다. 생활 용구인 토기 생산에 있어서는 회전대를 사용하여 토기 제작이 빨라지고 다양한 토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등요(登窯)[굴가마]가 등장하여 1,0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된 단단한 와질·경질 토기가 생산되었다.
철기 시기의 묘제에 있어서는 고인돌이 점차로 소멸하고 독무덤[옹관묘]나 돌덧널무덤[석곽묘], 널무덤[토광묘], 주구묘[주구(周溝)라고 하는 도랑을 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가 존재한다. 특히 주구묘는 충청도, 호남 지방에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고창에서도 성남리, 예지리, 만동, 봉덕리, 광대리, 도산리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독무덤[옹관묘]은 예지리, 성남리, 신덕리, 송룡리에서, 돌덧널무덤[석곽묘]은 신덕리에서, 널무덤[토광묘]은 예지리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구조는 평면 형태가 방형 내지 장방형, 4주식, 부뚜막, 벽구, 외부로의 배수로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주거지는 우평리, 남산리, 신덕리, 교운리, 봉덕리, 석교리, 신송리, 낙양리, 성남리 유적 등에서 조사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