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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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집필자 | 정재윤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충청남도 서산의 역사와 문화.
[개설]
한반도의 중서남부에 돌출한 태안반도에 자리한 서산은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선진 문물이 해양을 통해 충청 내륙 지방으로 전달되는 관문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다수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으며, 법인국사 탄문, 정인경(鄭仁卿)[1237~1305], 유숙(柳淑)[1324~1368] 등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활동한 내포 문화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선사 시대]
1.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서산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였다. 석남동 구석기 유적에서는 오목날의 밀개가, 일람리 구석기 유적에서는 격지와 잔손질된 긁개가 수습되었으며 도당리 구석기 유적과 대로리 주거지 유적에서도 격지와 찌르개, 찍개와 밀개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구체적인 문화적인 양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끼고 해안선이 발달하였고, 시내를 중심으로 넓은 평야가 갖춰져 있어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유물로는 서산시 대산면 웅도리 유두목마을에서 출토된 갈돌과 갈판이 유일하다. 구석기와 마찬가지로 지표 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것으로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웃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고남리 감나무골 등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패총 등이 확인되고 있어 서산 지역 역시 차후 신석기 시대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2.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서산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였다. 주거지, 분묘[고인돌], 패총, 선돌 유적 등이 다수 확인되고 있으며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서산 휴암리 선사 유적지에서는 장방형과 타원형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타원형 주거지의 경우 한반도 서부 지역과 중부 내륙 지방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일명 송국리형 주거지로 불린다.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평면 형태가 타원형으로 주거지 중앙에 2개의 중심 기둥을 세우는 송국리형 주거지 중 가장 이른 단계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서산 지역의 원형 주거지의 등장은 바다를 통한 문물 및 문화의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이후 역사 시대에 서산 지역이 선진 문물의 창구 역할을 수행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3. 초기 국가 시대
서산 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바다를 통한 선진 문물의 도입으로 일찍이 정치체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철기의 도입과 함께 사회 통합의 물결이 한층 더 거세져 삼한 연맹체가 성립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은 그 중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지금의 지곡면 일대를 중심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유적·유물이 확인된 사례는 많지 않으나 대로리 명지 고분 등을 통해 삼국 시대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 시기부터 강력한 토착 세력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
[고대]
1. 백제
서산 지역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중반 무렵 백제가 아산만 일대로 진출할 시기부터 백제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천동 유적과 기지리 유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백제의 지방으로 편입된 것은 4세기 중후반으로 여겨지는데 서산 부장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는 백제 중앙으로부터 사여된 금동관모, 금동신발, 환두대도, 중국제 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서산 지역의 토착 세력이 백제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방을 통제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서산 지역이 일찍부터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서남해안 진출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었다.
475년 한성 함락으로 백제가 지금의 공주·부여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온 후 서산 지역은 행정적으로 기군(基郡)과 예하 2현이 설치되었다. 당시 서산 지역은 중국과의 해양 교통에 있어서 전진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신라와의 해상 군사 활동 접경지도 중요한 위치였다. 따라서 방군성제(方郡城制)로 대표되는 백제 지방 통치 제도의 핵심으로 오방성(五方城) 가운데 서방성(西方城) 치소(治所)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선진 문물을 가야산 협곡을 따라 충청 내륙 지방의 공주·부여 지역으로 전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산마애삼존불상과 서산 보원사지 등이 조성되어 가야산 일대에 선진 불교문화가 꽃피기도 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의 임존성에서 활약한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道琛)이 승려였던 점을 통해서 가야산 일대에 꽃피웠던 백제 불교와의 일정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664년 당나라군이 웅진도독부 체제를 성립시켰을 때 지곡면 일대를 ‘오랑캐를 평정하였다’는 의미의 평이현(平夷縣)으로 설치한 사실로부터 서산 지역이 백제 부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2. 통일 신라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서산은 웅주(熊州) 부성군(富城郡)과 그 속현인 지육현(地育縣)과 소태현(蘇泰縣), 그리고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인 여읍현(餘邑縣)으로 편제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서산 지역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백제 시대 선진 문물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은 여전하였다고 생각된다. 신라 말에는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857~?]이 부성군 태수로 잠시간 부임하였는데, 이는 신라와 당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정에 밝은 최치원을 태수로 임명하여 신라 말의 지방의 혼란 속에서 중국과의 교류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신라 하대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는 보령의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크게 세를 떨쳤다. 이 때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의 비문을 썼을 정도로 서산 지역과 성주산파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3. 후삼국 시대
후삼국 간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서산 지역은 궁예(弓裔)[?~918]의 태봉(泰封)에 속하였다. 그리고 왕건(王建)[877~943]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직후 서산 지역은 일시적으로 후백제 측에 귀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의 개국 공신들 가운데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945] 등이 운산면이 속해 있던 혜성군[현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서산 지역이 친 고려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서산 지역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부성현을 중심으로, 속현인 지곡현(地谷縣), 소태현(蘇泰縣), 정해현(貞海縣), 여미현(餘美縣), 고구현(高丘縣)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 서산 지역의 지명은 잦은 변화를 거듭하여 1145년(인종 23)에 부성 현령을 두었다가, 1182년(명종 12)에는 주민의 반란 사건으로 관호를 삭제 당하였다.
이후 1284년(충렬왕 10)에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다시 승격되고, 1308년(충렬왕 34)에 서주목(瑞州牧)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서령부(瑞寧府)가 설치되었다가 그 후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다. 이러한 서산 지역의 지명의 변화는 지역출신 인물들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가 하면 지역 주민들이 농민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결과이다.
한편, 통일 신라 시기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던 서산 지역은 고려 건국 후에는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으면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대표적인 것이 가야산에 위치하고 있는 보원사이다. 현재 서산 보원사지 절터와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서산 보원사지 석조 등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에 의하면 고려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던 승려 탄문이 말년에 가야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탄문이 보원사로 들어갈 때 선·교승 천여 명이 영접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보원사의 위세가 대단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발달은 고대로부터 가야산이 선진 불교문화의 성지로 꽃피운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고려 말인 14~15세기 서산 지역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다. 그 이유는 서산 지역에 고려 13조창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현재의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일대]이 위치하였고, 삼남 지방의 미곡을 조운으로 수송할 때, 반드시 서산 지역을 거쳐서 수도인 개성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태안반도 서변의 태안군 소원면·이원면 일대를 거치는 뱃길이 복잡하고 풍랑이 심하여 조운선이 자주 침몰하였다. 따라서 고려 정부는 천수만과 가로림만이 깊숙이 만입하여 육지와의 거리가 짧은 서산과 태안 지역의 경계를 관통할 운하를 굴착하여 안전한 뱃길을 내고자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이처럼 왜구의 잦은 침입과 운하의 굴착 시도는 당시 서산 지역이 해상 교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산 지역의 자연적 환경이 갖고 있는 해양성과 개방성은 주민들에게 역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기질을 제공하여 새로운 선진 문물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반대로 왜적의 침입을 받을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서산 지역은 현재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조선 전기인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해미현(海美縣)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지서주사(知瑞州事)를 서산군(瑞山郡)으로 고쳤다. 이후 1895년(고종 32)에 해미현을 해미군으로 승격했으나, 1914년 서산군과 합쳐지면서 서산과 해미 지역이 현재의 서산시와 태안군의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서산 지역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바다의 물길이 깊숙이 만입하여 포구를 형상하고 있는 ‘안개’, 즉 내포 지역에 해당하였는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충청 지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서산 지역이 위치한 충청 지역은 조선 시대 호서사림의 근거지로 많은 사림(士林)들을 배출하였다. 전기에는 ‘향서당(鄕序堂)’으로 불렸던 유향소를 중심으로 사림들의 향촌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에 대한 훈구계의 반발로 유향소 복립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겪으면서 사림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서산에서는 많은 사족들과 주민들이 의병에 참가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 서산군수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서산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서산 향촌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고경명의 격문이 서산 지역에 도착하자 서산 지역의 사족들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 혹은 군량미 조달 등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서산 지역은 직접적인 전장이 아니었음에도 왜적이 출몰하고, 하급 관리들의 횡포로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민간에 전가하여 민생이 피폐하였다. 이후 선정을 베푸는 군수의 부임으로 조금씩 시정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족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왜란 이후의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향촌 활동을 통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그 와중에 향촌 세력의 대두로 성씨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혈연 중심의 문중이 결속력을 확보하거나 혈연적인 촌락을 중심으로 자기 방어를 모색하였다. 이에 족보의 편찬, 문중서원·사우의 건립과 같은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산 지역에는 성암서원, 송곡사, 진충사, 부성사, 숭덕사 등이 건립되었는데, 국가의 사액을 받은 성암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중사우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세도 정치의 횡횡과 정치적 문란은 지방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이에 삼정의 문란과 같은 사회적인 모순을 혁파하기 위해 반봉건적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서산 지역에서도 1776년(정조 원년) ‘역적의 고향인 서산의 읍호를 강등시킨다’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서 모종의 농민 항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 말은 내부의 혼란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서구 열강의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고 통상의 요구가 한층 강화되었다. 1832년(순조 32) 영국의 무장 상선인 조드 암 허스트호는 7월 12일 서산 간월도 앞바다에 나타나 이민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는 등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서산·태안 지역 관리들의 거부로 물러났다.
1866년(고종 3) 독일인 오페르트가 탑승한 영국 상선 로나호는 해미현 서면 일대, 즉 대호지면에 이르러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서산 지역 주민의 개방성은 오랜 시절부터 습득되어 온 특성이었지만 주체적이지 않은 강압에 의한 개방 요구는 수용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은 이전 시기에 비해 해양을 통한 외국과의 교류는 약화되었지만 바다와 육지가 공존하는 자연환경을 잘 이용하여 해양 문화와 내륙의 농경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근대]
1. 개항기
19세기 들어 서산 지역에는 천주교와 동학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피폐한 생활에 기인한 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포 지역의 개방적인 주민성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중앙 정부에서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들 종교를 억압하였고, 그 결과 1868년 병인박해 등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산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해미성지 등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산 지역에도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자 서산 지역에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러한 지주층과 관료층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1894년에는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하여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내세웠다. 당시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학 농민군을 북접농민군으로 부르는데, 서산·태안 일대의 농민이 중심이었다. 태안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전쟁 초반 서산·해미를 장악하였으나, 관군과 현대화된 일본군의 화력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궤멸되었다. 민초들이 중심이 된 동학 농민 전쟁은 사회적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서산 주민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2.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에 서산은 현재의 행정 구역 범위를 거의 갖추게 되었다. 서산군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태안군·해미군 등을 통합하여 20개의 면을 거느린 충청남도 최대의 군이 되었다. 1917년 서령면이 서산면으로, 지성면이 해미면으로 개칭되면서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개정이 마무리되었다. 전통 시기 해미는 서산과 행정 구역을 달리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 하나의 서산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하였다. 다만 주민들의 활동에 있어서는 나름의 지방색을 유지하였다.
서산 지역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돌출한 태안반도에 위치하여 철도가 개설되지 못하는 등 육지 교통이 불편하였다. 대신 포구 교통이 발달하여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팔봉면 호리의 구도포, 어송리의 창포, 성연면 명천리의 명천포 등이 번성하였다. 특히 명천포에서는 인천 지역으로의 정기선이 운행되어 서산 지역의 많은 인구가 인천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호의적이었던 서산 지역의 대지주 층은 산미 증식 계획 등 지주 중심 농업 정책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산 지역민들은 일제의 억압과 강압 통치에 반발하였다. 이에 3·1 운동 때 서산 지역에서는 많은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으며, 더불어 지역 사회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서산 지역에서도 강제 징용이나 징병, 강제 공출 등의 정책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
해방과 더불어 서산 지역에서도 자주 국가 수립을 위한 주민들의 활동이 가시화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여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정 수립 이후 좌익 불법 세력으로 간주되어 탄압받았다. 이 과정에서 서산 지역에서도 서산군 인민위원회와 독립촉성협의회 서산지부와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과 같은 좌우익 단체가 충돌하기도 하였다.
1948년 남북한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고, 좌우 갈등이 격화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서산 지역에서도 이러한 갈등 가운데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2004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특별법」에 기초한 조사를 통해 6·25 전쟁 시기 서산 지역에서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많은 정치 명망가들이 희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6·25 전쟁 이후 서산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행정 구역도 약간의 변화를 겪어 1957년 대호지면·정미면이 당진면에 이속되고, 1973년에는 태안면이, 그리고 1980년에는 안면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은 경부선을 축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서산 지역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1960~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간척 공사가 이루어지자 서산 지역에도 변화의 물결이 발생하였다. 1980년 이후 서산AB지구방조제 건설은 서산 지역의 경제와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방조제 건설 이후 드넓은 간척지에는 농장이 들어섰고, 담수호는 철새 도래지가 됨으로써 서산 지역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부상하였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와 중국의 무역 규모가 크게 늘면서 본격적인 서해안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결과 정부에서는 서해안고속국도를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한 산업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서산 지역에도 많은 공장이 들어섰고, 대산항을 대규모 산업항으로 건설하였다. 이처럼 성장 동력을 마련한 서산 지역에는 매년 인구가 유입되어 증가 추세에 있다.
참여 정부 시절 수도권 과밀화를 억제하고 성장 동력을 지방으로 분산하고자 하는 균형 발전 계획에 따라 서산 지역에는 서산테크노밸리와 같은 첨단 산업 도시의 조성이 확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수도권의 규제가 완화되자 서산 지역의 공업 단지 및 산업 도시 조성이 교착 상태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