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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378
한자 富城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정재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757년 12월연표보기 - 기군을 부성군으로 개정
공포 시기/일시 757년 12월
관할 지역 부성군 - 충청남도 서산시

[정의]

통일 신라 시대 충청남도 서산시 일대를 관할하였던 군(郡).

[개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서산 지역은 웅천주[웅주] 소속의 부성군(富城郡)으로 편제되었으며, 그 밑에 소태현(蘇泰縣)과 지육현(地育縣)이 설치되었다. 서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기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중국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부성군 태수로 활동한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지방 통치 제도를 개편하였다. 신라와 가야 고지에 3주, 고구려 및 백제의 옛 땅에도 각각 3주를 설치하여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총 9주를 설치하였다. 웅주에 속한 서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기에도 여전히 중국과의 교통로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큰 변화 없이 백제시대 기군(基郡)부성군으로, 그 영현인 성대혜현(省大兮縣)과 지육현(知六縣)이 소태현과 지육현으로 명칭만 바뀐 것이라 생각된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6 잡지 제5 지리3 신라 웅주 부성군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부성군은 본래 백제 기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소태현은 본래 백제 성대혜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지육현(地育縣)은 본래 백제 지육현(知六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북곡현(北谷縣)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46 열전 제6 최치원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최치원부성군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내용]

부성군의 치소(治所)나 통치 범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기존의 백제 기군을 명칭 중심으로 개편한 것이므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태안반도 전체를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반도 일대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그 중심지로 현 서산 시내 일원이 유력하지만 정확한 지점을 확정하기 힘들다.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는 부성산성 인근에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현재에도 부성산최치원을 기리는 사당인 부성사(富城祠)가 위치하고 있다.

[변천]

757년(경덕왕 16) 통일 신라의 웅천주(熊川州)부성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시대 잦은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면서 서산군(瑞山郡)·서주목(西州牧)·서령부(瑞寧府)을 거쳐 조선 시대 서산군이 되었다. 1914년 태안·해미를 합쳐 서산군이 설치되었으며, 1989년 서산읍(瑞山邑)이 시로 승격되고, 태안군은 다시 분리되었다. 1995년 서산시와 서산군의 통합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통일 신라 시기에도 부성군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대중국 교통로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말기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통일 신라 말인 890~893년에 부성군 태수로 임명된 것은 단순한 지방관의 임무를 띤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통일신라 말 지방 세력의 발호로 바닷길이 끊기고 중국과의 교류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중국 교섭의 중요한 통로였던 부성군에 중국 사정에 밝은 최치원을 태수로 임명하여 대중국 교섭 창구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6.26 내용 수정 문장 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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