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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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淑 |
영어음역 | Yu Suk |
이칭/별칭 | 순부(純夫),사암(思庵),문희(文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삼송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출생 시기/일시 | 1324년 - 유숙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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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40년 - 과거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351년 -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354년 - 우대언(右代言)·판전교(判典校)·판도판서(版圖判書)·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356년 -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359년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됨 |
활동 시기/일시 | 1362년 -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363년 -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로 1등공신에 책록됨 |
몰년 시기/일시 | 1368년 - 유숙 졸 |
추모 시기/일시 | 1376년 11월 -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719년 - 성암서원에 배향됨 |
출생지 | 양천장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삼송리 |
묘소|단소 |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41-3 |
사당|배향지 | 성암서원 -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673-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서령 |
대표 관직 | 첨의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
[정의]
고려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개설]
유숙(柳淑)[1324~1368]은 고려 후기 공민왕을 호종하여 정국을 이끈 당대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340년(충혜왕 1) 과거에 급제한 뒤 연경에서 공민왕을 호종하였고, 즉위 초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홍건적이 침입하자 또 다시 왕을 호종하여 남행하였고 이에 공신으로도 책록되었다. 관직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으며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가계]
본관은 서령[서산].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유성계(柳成桂)이다. 서령 유씨는 고려 때부터 서산 지역의 토착 성씨로 성장하였고 특히 유숙에서 유실(柳實), 유사종(柳嗣宗) 등으로 이어지는 고려말 조선초 절의계 인물들을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사암 유숙은 가정 이곡(李穀)과 교분이 있어 목은 이색(李穡)이 묘비문을 지어 주었고 유방택[류방택, 柳方澤]의 아들 유백유·유백순 역시 목은 이색의 제자였다. 그런가하면 이색의 손녀와 증손녀가 모두 서령 유씨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와 두 집안이 매우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었다. 이색의 묘비문을 유숙의 손자이자 이색의 손녀사위인 유기(柳沂)가 지은 것도 이러한 인연이다. 한편 사암 유숙의 후손들은 일찍이 출향하여 주로 경상도 지역에 많이 거주하였고, 서산 지역에 번성한 성씨는 주로 그의 사촌인 유방택의 가계이다.
[활동 사항]
유숙은 1324년 서산 동쪽 개심사 밑 양천장[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삼송리]에서 태어났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사록(安東司錄)이 되었으며, 이어 연경(燕京)에서 강릉대군[공민왕]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로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연경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燕邸隨從)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어 우대언·좌사의대부를 역임하다가 1352년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다시 기용되었다.
1354년 우대언(右代言)·판전교(判典校)·판도판서(版圖判書)·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56년에는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가 되었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도 임명되었다. 1359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그해 겨울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에게 권하여 남행하게 하였고, 이어 한림학사승지동수국사(翰林學士承旨同修國史)를 역임하였으나, 안우(安祐) 등의 위협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나갔다.
1362년에는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시중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홍건적의 난 때의 공으로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의 호를 받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비로소 서령군에 봉하여졌다. 1363년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정당문학겸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로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첨의찬성 사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65년 유숙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시골에 돌아가 있다가 1368년 영광에서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당하였다.
[묘소]
유숙의 묘소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41-3번지에 있다. 1981년에 전면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 유숙의 묘비는 목은 이색이 찬하였으며 행장은 1959년에 후손 유인택이 썼다. 한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44번지에는 그의 신도비[1981년 개수]와 개수된 묘비[1981년 김세기 찬]가 있으며, 서령 유씨의 재실인 공소재(孔昭齋)[1987년 창건]가 서산시 인지면 남정리에 위치한다.
[상훈과 추모]
1376년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과 1719년(숙종 45) 성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