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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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巖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67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719년 - 성암서원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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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729년 4월 - 조정의 명에 의하여 훼철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60년 - 김홍욱의 후손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영의정 김상로의 주청으로 복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24년 7월 - 사우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41년 - 유씨 문중 지원으로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49년 - 유림과 양가 후손에 의하여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8년 - 서산군의 재정 지원으로 보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성암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성암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21년 5월 21일 - ‘성암(聖巖)’이라 사액 받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7년 - 성암서원 자리에 양가의 후손들이 유허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7년 - 중건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9년 - 『성암서원지』 편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6년 - 『성암서원지』 발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성암서원지』 중간 |
현 소재지 | 성암서원 -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673-1 |
성격 | 서원 |
양식 | 홑처마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개설]
성암서원(聖巖書院)의 제향 인물은 고려 말 공민왕 대의 문신 사암(思庵) 유숙(柳淑)[1316~1368]과 조선 후기 인조부터 효종 대의 문신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1602~1654]이다. 사암 유숙은 고려 때부터 서산 지역의 토착 성씨로 성장한 서령 유씨(瑞寧柳氏)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이다. 서산의 서령 유씨는 고려 후기 및 조선 전기 절의계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여 명성을 날린 가문이다.
학주 김홍욱은 원래 안동에 세거하였다고 하는데, 김홍욱의 증조부 김연(金堧)이 명종조에 만년의 은거지로 서산을 택한 이후로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서산 일대에 정착하였다. 김홍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왕을 호종하였다.
[위치]
서산시 읍내동 서문 밖 부춘산 기슭에 자리한다. 서산시청의 남쪽 성 밑 마을에서 서산시 인지면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250m 정도 가면 새마을 회관이 나오고, 새마을 회관 좌측으로 소로가 나 있는데, 소로를 따라 다시 300m 정도 가면 부춘산 기슭에 성암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변천]
성암서원의 건립은 김홍욱에 대한 국가의 포장과 추숭이 이루어지는 것과 짝하여, 1719년 2월 호서 유생 60여 명이 청건 상소를 올려 7월에 허락을 받아 내고, 이후 통문을 돌려 재물을 모아 건립되었다. 그리고 서원의 건립을 이루어 낸 지역 유생들은 다시 청액의 상소를 올렸으며, 마침내 1721년(경종 1) 5월 13일에 허락이 떨어져 5월 21일 ‘성암(聖巖)’이라 사액 받았다.
한편 성암서원은 건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조 초년에 일시 훼철되었다. 이는 『성암서원지』에 “기유년[1729년] 4월 조정의 명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영조가 각 지역에서 서원이 남설되자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고 강력한 서원 통제책을 실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후 성암서원의 복설은 1760년(영조 36)에 김홍욱의 후손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영의정 김상로의 주청으로 이루어졌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또 다시 훼철되었고, 훼철 시 위판은 유허지에 석회로 광을 만들어 도자기에 넣은 후 분묘처럼 매안하였다. 이후 1897년(고종 34) 성암서원의 자리에 양가의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성암서원의 복설 운동이 일어나 이듬해인 1924년 7월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게 되었다. 1988년에는 서산군의 재정 지원으로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졌고, 이듬해인 1989년에 『성암서원지』를 중간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고,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에는 성암서원 중건비(聖巖書院重建碑)가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內三門)과 사괴석 담장으로 구획된 고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위치한다.
사당은 전면 반 칸에 전퇴를 만든 후 그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의 세부 건축 구조는,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 계통이나 변형된 형식이고, 창방 위에 운공이 끼워진 소루가 정면과 측면 간에 각 3구씩, 그리고 후면에는 운공 없이 소루만이 4구씩 배치되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현황]
성암서원 관련 자료로는 성암서원의 연혁과 관련 자료를 수록하여 1966년에 발행한 『성암서원지』와 김홍욱의 『학주집(鶴洲集)』이 있다. 성암서원 내에는 1937년에 건립된 성암서원 중건비와 1949년 서원의 보수 시 내역을 기록한 「성암서원 중수기(聖巖書院重修記)」가 전한다. 성암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유물로는 『원지(院誌)』 1권, 『중건지(重建誌)』 1권, 『존재유선생유고(存齋兪先生遺稿)』 3권 등이 전해진다.
[의의와 평가]
성암서원은 조선 후기 서산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제향 인물 역시 서산에 연고를 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서원의 건립과 사액의 연혁, 훼철과 복설의 과정, 그리고 당시의 주도적인 인물의 동향 등이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 당시 서산 지역의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