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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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ism |
이칭/별칭 | 내포 지역 천주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정환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설]
천주교는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실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실학자 가운데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을 따르는 성호학파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천주교 수용의 선구자가 되었다. 성호학파는 안산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사람이 가장 많았지만 영남과 호남, 그리고 충청도 내포의 예산과 아산 일대에도 그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내포 지역 성호학파 사람들의 거주지는 내포의 중심 하천인 삽교천과 무한천에 인접해 있었다. 특히 삽교천에 맞닿아 있는 고덕[현 예산군 고덕면]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서울을 오가며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내포에 소개하였다. 그 길을 중심으로 내포의 첫 천주교 신자가 생겨났고, 조선 후기 내내 유지되었던 탄탄한 신앙 공동체도 그 일대에 먼저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 내포 지역 천주교]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선교사가 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천주교가 전해진 유일한 사례이다. 이승훈이 조선으로 돌아와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함으로써 천주교가 확산되었으나 처음부터 모든 지역에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4개 지역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먼저 생겨났다. 서울과 경기도 양평 일대의 양근 지역, 전라도 전주 일대의 호남 지역, 그리고 충청도의 내포 지역이었다.
당진을 아우르는 내포 지역의 첫 신자로는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출신의 이존창을 꼽는다. 이존창은 내포 지역을 왕래하는 실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접하여 1784년 무렵 세례를 받았다. 이존창은 고향 여사울을 중심으로 천주교 전파에 나섰는데 충청 감사 박종악이 1791년에 작성한 『수기(隨記)』에 의하면 여사울에 있는 100여 호의 가구 중에서 80호가 천주교에 물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내포의 천주교는 평민들이 주도하는 민중 종교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다른 지역의 천주교가 양반이나 중인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졌던 반면 내포의 신앙 공동체는 처음부터 달랐다. 첫 신자인 이존창이 평민[기록에 따라서는 사노비 출신이라고도 함]이었고 이존창과 더불어 지도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도 대부분 평민이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신분과 남녀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적인 이념 및 가치 질서와 충돌할 요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이었다. 당시에는 제사 안에 미신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어 제사를 금지시켰고, 이것이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첫 번째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신앙 내용도 갈등의 한 요인이었지만 신자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도 큰 문제가 되었다. 내포 출신의 신자들이 보여준 신앙 실천이 조선에서 중시하던 신분 질서와 남녀 관계를 뛰어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자들의 행동은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신분 질서와 남녀 사이의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었기에 천주교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평화롭게 수용된 천주교는 1791년 진산[현 금산군 진산면]에서 발생한 윤지충의 제사 거부 사건으로 인해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반발이 증폭되었고, 1801년부터는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규정하는 법이 만들어져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가 일어났다. 그중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의 병인박해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4대 박해라 부른다. 이 박해들로 인해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한편 이 박해들은 천주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역할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진 내포의 신자들이 각 지역에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내포 천주교회를 조선 시대 ‘신앙의 못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진의 천주교의 변천]
조선 후기 내내 박해를 받던 천주교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대외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신앙의 자유를 조금씩 얻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1886년 한국과 프랑스 간에 조약이 체결될 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항목이 간접적으로나마 포함되자 조선 정부에서 주도하는 국가적 박해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서서히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던 신자들이 당진 지역으로 되돌아오고,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나면서 교세가 확대되었다. 마침내 1890년에 이르러 당진 지역 천주교의 모체이며 나아가 충청남도 천주교의 모체인 합덕 성당이 설립되었다.
합덕 성당을 중심으로 신자가 증가하면서 당진 지역에 새로운 성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당진 성당, 1960년에는 신합덕 성당이 차례로 합덕 성당에서 분가하였고, 1975년에는 신평 성당이 신합덕 성당에서 분가하였다. 1970년대까지 당진 지역의 천주교 교세는 합덕과 신평 지역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후 삽교천 방조제가 건설되어 교통의 중심이 바뀌고, 산업화에 따른 이농 현상, 그리고 군청 소재지로서 이점 등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자 천주교 교세도 같이 커졌다. 결국 당진 성당의 신자 증가에 따라 2003년에는 기지시 성당이, 2011년에는 수청 성당이 당진 성당에서 분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