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85 |
---|---|
한자 | 金大建 |
영어공식명칭 | Gim Daegeon |
이칭/별칭 | 김재복,김안드레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환 |
출생 시기/일시 | 1821년 - 김대건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37년 - 김대건 중국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경리부 신학 과정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 김대건 중국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경리부 신학 과정 이수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845년 8월 17일 - 김대건 사제 서품 |
활동 시기/일시 | 1845년 - 김대건 서울, 경기도 등지에서 전교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846년 9월 16일 - 김대건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 |
추모 시기/일시 | 매년 7월 5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출생지 | 솔뫼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14 |
학교|수학지 |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경리부 - 중국 마카오 |
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천주교 조선 교구 부교구장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천주교 사제.
[개설]
김대건(金大建)[1821~1846]의 집안은 1784년경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세례명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1821년 아버지 김제준[세례명 이나시오]과 어머니 우르슬라 사이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활동 사항]
1821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첫 번째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며,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신학생 선발과 마카오 유학]
내포 지역에서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자 김대건의 집안은 고향 솔뫼를 떠나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동에 정착하였다. 김대건이 열다섯 살 때인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로서는 첫 입국이었는데, 모방이 소속된 파리 외방 전교회는 선교지에서의 현지인 신부 양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모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박해로 인해 조선에서는 공부를 하기가 불가능하였으므로 이들 세 명의 신학생은 중국 마카오로 보내졌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은 마카오에서 서양 언어의 뿌리인 라틴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그들은 아시아 선교를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을 통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서양에 개방되어 있는 항구인 마카오에서 급변하는 세계를 눈으로 확인하며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훗날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그들이 공부하고 있는 동안 1839년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발생하여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이 순교하였다. 김제준은 어떤 사람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는 것이 드러나자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형벌에 못 이겨 한때 배교하였으나 다시 취소하고 그해 9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박해로 가장을 잃고 아들을 중국으로 떠나 보낸 김대건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다.
김대건은 신학과 철학 외 서양의 학문을 폭넓게 배웠다. 김대건이 작성한 「조선 전도(全圖)」가 한 사례가 된다. 김대건은 1845년 서양의 지도 제작법에 따라 조선 전체를 그린 지도를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보냈다. 이 지도는 한국인이 제작하여 서양에 알린 첫 번째 지도로, 한국의 지명들이 처음으로 한국식 발음으로 적혀 소개되었다. 그동안 서양에 알려진 조선 지도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조선의 지명들이 중국이나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김대건이 작성한 지도에는 독도를 ‘우산(于山, Ousan)’이라고 표기하여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대건의 입국로 개척]
김대건의 아버지가 순교한 기해박해는 조선 천주교회에 크나큰 어려움들을 가져다주었다. 그중 하나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갈 길이 봉쇄되었다는 점이다. 국경 검문이 강화되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들어가는 육로 입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바닷길을 통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해금령(海禁令)이 내려져서 배를 통한 조선 입국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임무가 김대건에게 주어졌다.
1842년 2월 김대건은 1차 탐색을 시작하였다. 먼저 김대건은 프랑스의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여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8월 29일 남경 조약이 체결되면서 에리곤호가 북상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김대건은 조약이 체결되는 현장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차 탐색은 같은 해 12월에 시행되었는데 의주 변문을 통한 방법이었다. 중국 봉황성에 있는 책문과 조선 의주 변문의 혼잡한 상황을 틈타 김대건 홀로 조선에 입국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한 의복과 언어의 문제로 다시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이듬해인 1843년에도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 조선의 밀사들과 접촉하였으나 결국 입국에 실패하였다.
의주를 통한 입국 실패의 경험은 새로운 입국로를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1843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 5일까지 김대건은 두만강 인근의 북관을 이용하는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 달간 훈춘 지역을 답사하였다. 조선과 청은 1637년 이후 회령에서는 1년에 한 번, 경원에서는 2년에 한 번 시장을 열기로 약정한 바 있다. 김대건은 경원에서 열리는 시장을 이용한 조선 입국로를 모색하였다. 1844년 3월 김대건은 미리 약속해 놓은 조선 밀사를 만나기 위해 경원으로 가서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경원을 통한 입국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 외에도, 함경도를 거쳐 조선 전체를 통과하여 남하해야 한다는 난관이 있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사제품과 조선 입국]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은 중국에서 최양업과 함께 신부가 되기 이전 단계인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김대건은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영입하기 위해 1845년 1월 1일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김대건은 서울에 도착하여 3~4월에 현석문[세례명 가롤로]의 도움을 받아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순교자들의 전기와 함께 각종 형벌을 묘사한 삽화가 들어 있다. 더불어 김대건은 중국으로 건너가 프랑스 선교사들을 태워 올 배를 준비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1845년 4월 30일, 김대건은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중국으로 향하였다. 김대건 일행은 폭풍으로 인한 난파와 표류 끝에 35일 만인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해 8월 17일 김대건은 상하이 연안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함께 간 조선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품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으로서 받은 첫 사제품으로, 조선에 천주교회가 수용된 지 61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김대건 일행은 8월 31일 프랑스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자신들이 가져간 배에 태우고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고,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10월 12일 강경에 도착함으로써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의 첫 입국이 성공을 거두었다.
[체포와 순교]
조선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한동안 강경에 머물렀다. 이후에는 서울과 경기도 은이 공소 등을 방문하여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행한 짧은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46년 6월 김대건이 황해도 앞바다에 있는 순위도에서 관졸들에게 체포되었으므로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김대건이 이렇게 일찍 체포된 데에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바닷길 개척 때문이었다.
1845년 김대건 일행이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 선교사들을 태우고 조선으로 다시 입국한 일은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으나 그 방법을 계속 이용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에게 안전한 항로를 개척하도록 지시하였다. 김대건은 1846년 4월부터 새로운 해로 개척을 위해 백령도로 출발하였고, 그 일을 수행하던 중 6월 15일 순위도에서 네 명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대건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간 배운 서양 지식과 세계 정세에 대한 이해를 피력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김대건을 처형하기보다는 김대건의 학식과 재능을 조선을 위해 이용하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프랑스 세실(Cécille) 함장이 이끄는 함대가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남으로써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함대가 온 목적은 기해박해 때 처형된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김대건의 체포와 연결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김대건의 처형이 서둘러졌고, 1846년 9월 16일 김대건은 한강 새남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첫 한국인 사제로서,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로서 일찍부터 공경을 받았다. 처형 후 한강 새남터에 버려져 있던 김대건의 시신은 그해 10월 조선 신자들에 의해 옮겨져 경기도 안성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모셔진 유해는 박해가 끝난 후 김대건이 복자품과 성인품을 받으면서 국내외의 성당과 성지에 모셔져 특별히 공경을 받고 있다.
[사상과 저술]
김대건은 한국인으로서 외국에서 서양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운 첫 인물이다. 김대건이 라틴어, 한문, 한글로 쓴 22통의 편지가 남아 있는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묘소]
김대건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의 가톨릭 대학교 성신 교정 대성당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매년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의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인 2021년의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