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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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學-傳來 |
영어공식명칭 | Introduction of Western Learn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천주교 전래 과정.
[개설]
서학(西學)은 서양 학문과 서양 과학 기술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천주교를 의미한다. 원래 서학은 중국의 명·청대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사용한 명칭이다. 이들은 천주교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전반적인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학문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서학 관련 서적을 국내에 들여왔다.
서학이 천주교로서 종교성을 띤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1784년(정조 8), 조선 천주교회가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이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은 이존창(李存昌)[1759~1801]은 1785년경 천주교를 내포 지역에 확산시켰다. 그 후 조선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진 지역 천주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 성지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탄생한 곳이고, 1929년 건립된 합덕 성당은 당진의 대표적인 성당 중 하나다.
[역사적 배경]
당진 지역 서학의 유입 배경으로 첫 번째는 이존창의 활동이다. 이존창은 권철신(權哲身)[1736~1801]의 문하생으로 양명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개혁 성향의 학문에 심취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존창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여사울’을 내포 지역 천주교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다.
두 번째 배경은 평야 지대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다. 대다수 농민은 재경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이었고, 신분적 불평등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농민들은 천주교를 정신적 위안처로 삼고자 하였다.
세 번째 배경은 지리적 특성이다. 당진 지역은 ‘내포(內浦)’라 하여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해안을 갖고 있다. 썰물 때는 바닷물이 한없이 빠져나가지만, 밀물 때는 내륙 깊이 바닷물이 들어온다. 극심한 천주교 탄압 속에서도 외국인 신부와 신자들이 비밀리에 이동할 수 있었고, 때로는 은둔하며 천주교를 지키는 데 매우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당진 지역 천주교가 크게 번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과]
천주교가 당진 지역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인 1785년경이었다. 흔히 ‘내포의 사도(使徒)’로 알려진 이존창에 의해서였다. 내포 지역의 천주교는 충청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1861년 베르뇌 주교가 전국을 선교사가 상주하는 8개의 본당으로 나눌 때, 내포 지역에만 2개의 본당[상부 내포와 하부 내포]이 있었던 것만 보아도 그 비중을 알 수 있다.
이존창은 일명 ‘단원’이라고 불렸으며 예산 ‘여사울’에서 양인 집안으로 태어났다. 18세인 1776년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1784년까지는 녹암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철신은 과거를 멀리하고 양명학 이론을 수용하였으며 유교 경전 해석에도 혁신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존창도 이때부터 관료가 되기 위한 학문에서 벗어나 개혁 성향을 갖게 되었으며 점차 서학에 기울게 되었다.
이존창은 1784년 교회 창설 직후 영세를 받고 입교하였으며 내포 지역을 위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1801년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는 이존창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특히 다른 지역은 양반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이곳은 일반 양인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층으로 형성되었다. 이를 ‘내포형 신앙 공동체’라고 하는데, 이존창의 신분이 일반 양인이었기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내포 지방의 솔뫼[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종조할아버지인 김종현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가족들에게 전교하였고 증조할아버지인 김진후, 할아버지인 김택현, 김한현, 김희현 등이 입교하였다. 이존창의 조카딸은 김대건의 할머니였다. 김대건이 태어나기 이전에 김진후는 1814년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김한현도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아버지인 김제준은 후일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상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846년 9월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결과]
당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정부의 거듭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산간벽지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옹기 굽기와 담배 농사에 종사하거나 화전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갔다. 그리고 1886년 한·프랑스 수교 이후 선교사들의 전교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당진 지역 천주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산간벽지에서 평야 지대로 나왔고, 1899년 합덕면 합덕리에 성당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발전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현재의 합덕 성당을 완공하였다. 합덕 성당은 드넓은 평야 지대를 조망하는 언덕 위에 높은 고딕식으로 세워졌고 내포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진 지역 천주교는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그 중심 역할을 할 정도로 위상이 매우 높다. 그 중심 인물은 이존창이며 양인 중심의 내포형 신앙 공동체를 구축하였다. 당진 지역 천주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배출하였고, 곳곳에 천주교 관련 유적을 남겼다. 또한 당진 지역 천주교는 주민의 정신적 위안처로 자리 잡았고, 근대 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에게 근대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