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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06
한자 開港期
영어공식명칭 Opening Port Er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석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당시 조선의 최대 과제는 지배층의 강력한 개혁과 피지배층인 농민층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배층의 개혁은 성리학을 앞세운 전통적 양반층과의 갈등을 통합하지 못하였고, 청과 일본의 침략적 간섭을 배제하지 못하였다. 지배층의 혼돈이 가중되는 가운데 일제는 고리대를 활용한 무차별적 ‘미곡 수탈’에 나섰다. 쌀 수탈에 집착하는 일본 상인의 침투는 곡창 지대인 당진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농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충남의 서북단에 있어서 개항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조류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로보다 발달된 해로를 통해 경향 각지의 움직임은 인지할 수 있었다. 특히 1880년대 일본 상인의 미곡 수탈은 당진 지역의 우평·강문 평야에서도 진행되었다. 우평·강문 평야는 ‘방곡령(防穀令)’ 대상지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한 항쟁 의식은 1880년대 동학의 급속한 유입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1894년 7월 청일 전쟁의 발발은 당진 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당진 해안에 인접해 있는 풍도 앞바다에서 촉발된 청일 전쟁은 근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일찍이 1868년(고종 5)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에 등장하였던 증기선인 ‘이양선(異樣船)’에 경악한 당진 지역 주민들은 근대 무기의 우수성을 절감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당진 지역 근대 교육에 반영되었고, 동학과 천주교 개신교의 유입에 앞장서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행정 구역 개편]

일제 침략과 함께 진행된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은 1895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핵심 내용은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충청도 소속이었던 당진 지역은 홍주부 관찰사의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당진 지역은 당진군과 면천군으로 주변의 20여 개의 군과 더불어 홍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편 작업은 1895년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백성들의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친러 정권이 들어선 1896년 13도제로 전환되었다. 이때 좌도와 우도로 나뉘던 전통적 지방 제도가 남도와 북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당진 지역은 공주에 도청이 있는 충청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는 1906년 9월 전면적인 지방 행정 제도의 개편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던 ‘월경지(越境地)’를 간단명료한 지방구획으로 정리했다. 이때 삽교천 양안에 즐비하던 월경지들이 인근 군에 귀속되었다. 삽교천 서쪽에 있던 월경지들은 모두 면천군에 흡수 통합되었다.

우선 홍주목 소속이던 신남면(新南面)·신북면(新北面)·합남면(合南面)·합북면(合北面)·현내면(縣內面) 등 5개 면이 면천군에 흡수되었다. 또한 덕산군 소속인 비방면(菲芳面), 아산군 소속의 이서면(二西面), 천안군 소속의 우평(牛坪) 마을도 면천군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면천군은 22면 308동리를 관할하는 거대 군이 되었다. 한편 당진군은 8면 130동리를 관할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대대적인 지방 행정 구역 통폐합이 또 다시 이루어졌고, 면천군은 당진군에 흡수되었으며 면으로 격하되었다. 일제는 행정 구역 통폐합에 대해 ‘행정의 효율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효율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존의 공동체 마을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동학과 기독교 유입]

동학은 1860년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하여 창도되었지만 최제우는 처형되었고,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에 의하여 조직화되었다. 동학은 1870년대 들어서 당진 지역에 유포되었다. 당진 지역 주민들은 동학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당진 지역은 비옥한 평야 지대를 보유한 곳으로 자영농 대신에 소작농이 많았다.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큰 신분 구조상, 동학의 반봉건 사상은 농민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상인의 미곡 수탈에 항쟁하는 농민의 의식은 동학의 반외세 사상과 연결되었다.

당진 지역 동학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창구(李昌九)였다. 이창구당진시 송악읍 월곡리에 본거지를 두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1894년 이창구는 관군에 체포되었고, 1894년 10월의 합덕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관군에게 패배하면서 동학은 크게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1894년 10월 동학 농민군이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 승전곡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격퇴한 전투는 이곳에 길이 전해지고 있는 승전보였다. 이후 당진 지역 동학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당진의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1900년경 활약한 활빈당과 1905년 이후의 항일 의병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천주교가 당진 지역에 유포된 것은 그 유래가 깊다.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1784년(정조 8)에 조선 천주교회가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은 이존창(李存昌)[1759~1801]은 1785년경 천주교를 내포지역에 확산시켰다. 그 후 조선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진 지역 천주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솔뫼 성지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탄생지이고, 1929년 건립된 합덕 성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당 중 하나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감리회도 당진 지역에 전래되었다. 당진의 감리회는 면천 군수인 유제(劉濟)에서 비롯되었다. 유제는 1895년 6월부터 1896년 10월까지 면천 군수를 재직한 인물이다. 유제는 면천 군수를 그만두고 덕산군 한내에 거주하면서 기독교를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 시기는 1901년이다. 한편 당진 최초의 교회는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에 있었던 난지도 감리교회였다. 미국인 선교사 샤프(Robert Arther Sharp)가 1903년 5월, 대난지도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샤프는 석문면에 상륙하여 1905년 석문면 삼화리 외창삼화 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당진의 개신교는 크게 확대되었는데, 중심 도시인 읍내에서 주변으로 확산되지 않고 바닷가 주변에서 읍내 지역으로 전도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근대 교육의 시행]

개항 이후 근대화 물결의 도래와 함께 당진 지역에도 신학(新學)이 수용되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포구들이 형성되었고 포구들을 통하여 신문물이 전래된 것이다. 근대 교육의 수용은 여러 형태의 학교를 곳곳에 설립케 하였다. 학교는 정부의 시책에 의한 허가 형태로 설립되기도 하고, 근대화에 개명한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하여 사숙(私塾)의 형태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종교의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히 지식인들은 을사늑약을 당하면서 그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립 학교가 크게 증가했다. 대표적인 학교로 매괴 학교(玫瑰學校), 당성 학교(唐城學校), 통명 학교(通明學校), 면양 학교(沔陽學校), 남산 가숙(南山家塾), 미산 학교(嵋山學校)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개화기 당진 지역은 봉건과 반봉건, 외세 침투와 이에 대한 항쟁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긴장이 감도는 공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점차 강화하였고 각종 지방 제도 개편 과정을 통해 한민족을 혼란에 빠트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당진 지역 주민들은 1785년 이래로 유입된 천주교를 신봉하였고, 1870년대부터 유행한 동학에 심취하였다. 당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1868년 오페르트 사건을 계기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를 계기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진 지역은 1900년대초 개신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근대 의식을 확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개신교는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에서 출발하여 육지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웠고, 당진과 합덕으로 신앙의 중심을 옮겨갔다. 근대 의식의 확산은 근대 학교 설립으로 계승되었으며, 이를 통해 학생과 주민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근대 교육은 항일 의병과 더불어 당진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의 국권을 회복 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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