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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394
한자 東學農民戰爭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당진 동학농민전쟁 발발
발생|시작 장소 당진 동학농민전쟁 - 충청남도 당진시

[정의]

1894년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전개한 혁명적 농민 운동.

[개설]

동학농민전쟁은 안으로 정치와 사회 개혁을 이루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혁명적 농민 운동이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에 창도한 이래, 1870년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조직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학은 당진 지역에도 유입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동학을 믿게 되었다. 특히 지주들의 수탈에 고통을 겪던 당진 지역 농민들은 동학사상에 많은 위안을 얻게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을 때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참여 인물은 이창구(李昌九)이며, 대표적인 전투는 1894년의 합덕 전투와 승전곡[승전목]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동학 농민 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이후 농민의 사회 개혁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당진 지역 항일 투쟁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홍성·예산·아산 지역과 함께 삽교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옥한 평야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 지역을 내포(內浦)라고 부른다. 내포 지역은 조선 시대 인근 군·현의 월경지(越境地)로 구성되었으며, 각종 부세(賦稅) 징수의 대상지였다. 이 때문에 내포지역 농민들은 자영농이 드물었고, 국유지나 부재지주의 농지를 소작하는 영세한 소작농이 많았다. 한말에 이르러 세도 가문의 수탈과 일본 상인의 고리대를 활용한 미곡 매집(買集)으로 인하여 농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확산된 종교가 동학이었다. 동학의 반봉건·반외세 사상은 내포 지역 농민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내포 지역 농민들은 자연스럽고 빠르게 동학에 흡수되었다.

[당진 동학의 시작]

동학이 내포 지방, 특히 당진 지역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행정 구조상 당진 지역은 홍주를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방의 중심권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아산과 예산 지역의 동학과 함께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그 시기는 1870~1880년인데 동학 교단이 최시형에 의하여 재정비 과정을 거치던 시기였다.

동학 교단은 1871년 영해 교조 신원 운동 이후 심각한 타격을 입고 강원도 산간 지방인 영월·단양을 중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부터 최시형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시형은 1875년 정선에서 새로운 의례를 제정했고 10월부터 순회 설법을 시작했다. 그 결과 동학 교단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이에 따라 동학은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동학이 내포 지역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예산의 박인호(朴寅浩)[이칭 朴道一, 1855~1940]]가 동학에 입도한 이후였다. 천도교 제4대 교주를 지낸 박인호는 1855년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박인호는 11세 되던 해에 한학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5세가 되던 해부터는 지가서와 의서 등을 공부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내포 지역 동학 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박희인(朴熙寅)[이칭 朴德七]도 박인호의 권유에 의하여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희인은 내포의 서부 지역인 예산·태안·해미·서산·당진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최근 태안 지역의 동학 활동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박희인은 1893~1894년을 중심으로 태안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특히 태안군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원북면, 이원면, 소원면에서는 박희인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박희인의 포교 지역은 매우 넓어서 그 범위가 태안에 머무르지 않고 서산·해미·예산·당진에까지 이르렀다.

[교조 신원 운동 참여]

내포의 동학교도들은 동학의 공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교조 신원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1893년 1월 광화문 앞에서 전개된 교조 신원 운동에는 내포 지역 출신 박인호, 박희인, 박인호의 사촌 동생인 박광호(朴光浩) 등이 중심인물로 참여했다.

1890년대 초기 교조 신원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포 지역 동학은 중앙에서 위치를 더욱 확고히 했고 일반 대중에게도 뚜렷이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동학의 교세는 크게 확산되었고 조직도 정비되었다. 『홍양기사(洪陽紀事)』의 기록에 의하면 “호남 지방의 전봉준김개남은 가장 유명한 자들이고, 호중의 거괴는 박덕칠(朴德七)[박희인]·박도일(朴道一)[박인호이창구(李昌九)·손사문(孫士文)·안교선(安敎善)·황하일(黃河一)·이종필(李鍾弼)·이성시(李聖時)였다. 박덕칠은 예산에 거주했기 때문에 박덕칠을 따르는 자들을 ‘예포(禮包)’라고 불렀다. 박도일은 덕산에 거주했기 때문에 박도일을 따르는 자들을 ‘덕포(德包)’라고 불렀다.”라고 했고, “당진 지역은 이른바 이창구가 목포 수접주(木包首接主)를 자칭하면서”라 했듯이 동학 조직이 당진 지역에도 정비되어 갔다.

1894년 9월이 되면서 면천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크게 활동하게 되었다. 이미 기포한 주요 인물은 홍주의 김영필(金永弼)·정대철(丁大哲)·이한규(李漢奎)·정원갑(鄭元甲)·나성뢰(羅成蕾),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의 박덕칠(朴德七)·박도일(朴道一), 대흥의 유치교(兪致敎), 보령의 이원백(李源百), 남포의 추용성(秋鏞成), 정산의 김기창(金基昌), 당진의 이창구(李昌九) 등이었고, 박덕칠[박희인]과 박도일[박인호]는 각각 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때 동학농민전쟁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순천에서는 9월 1일[양력 9월 29일], 농민군 부대가 섬진강을 넘어 하동을 공격했으며, 9월 2일에는 진주에서 농민군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고, 9월 3일에는 경상도 진해와 신령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전라도 일부 집강소 접주들의 재봉기 요청에 관망하던 전봉준도 제2차 농민 전쟁의 봉기를 결정한 것도 1894년 9월초였다. 전봉준은 9월 10일[양력 10월 8일], 삼례에서 재기포를 단행했다.

[당진 동학의 대표 인물]

이창구를 중심으로 하는 당진 지역 동학 농민군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홍양기사』에 따르면 “홍주 동문 밖에 나가보니……어떤 사람은 큰 말을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그가 이창구라고 하는 자인데 지금 최적(崔賊)[최시형]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 기록을 보면 이창구도 철저히 최시형 조직의 일부로서 활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후 최시형의 기포령은 9월 18일에 내려졌다. 북접 동학군의 총 기포를 결의한 것이다. 기포령이 내포 지역에 도달한 것은 9월 그믐 경[양력 10월 28일]이었다. 그 결과 예포 대접주 박희인의 예포 농민군은 예산군 거구화면 목소리[목시, 현 예산군 삽교읍 성리]에 대도소를 세우고 농민 전쟁의 태세로 돌입했다.

이창구가 ‘월곡[현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 달아실 마을]’에 거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자 주변의 반농민군들은 유회군을 구성하여 이창구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들은 인접 지역인 송악읍 중흥리에 위치한 송악산[숭악산] 위에 성을 축조하여 농보(農堡)로 삼았다. 하지만 농보는 축조하자마자 이창구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창구는 군사력을 더욱 증대시켜 송악면 기지시리에 있던 국수봉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이창구는 “재물을 탈취하고, 졸개들을 시켜 촌가의 창고를 봉하게 하고, 관청의 창고나 개인집을 막론하고 무기를 모두 찾아”내는 등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당시 면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은 우평강문 평야를 배경으로 수도권에 식량을 공급했던 조운의 중심지였다. 이창구는 이러한 곡물을 탈취함으로써 조운을 불통시켰다. 이 때문에 이창구는 정부군에게 있어서 반드시 진압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송악산 농보는 회복해야 할 거점지로 간주되었다.

이창구가 관군에 의해 검거된 것은 10월 22일[양력 11월 19일]이었다. 『홍양기사』 10월 22일 조에는 이창구를 체포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홍주목의 관군은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이창구를 체포하기 위하여 이창구의 첩을 이용하기로 했다. 관군은 이창구의 첩을 인질로 잡아두고 회유하여 이창구의 경계심을 약화시켰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이창구의 심복인 강종화·편중삼·김영배 등 3명을 회유했고, 송악산의 농보에서 내려온 이창구가 첩을 만나는 순간, 체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군은 이창구를 결박하고 촌민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홍주목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덕산과 면천에 사는 수천 명의 촌민들이 한꺼번에 와서 이창구를 가볍게 처리할 것을 걱정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적을 참수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여 그 날로 형벌을 시행했다.

[합덕 전투]

이 시기 당진 지역 동학농민전쟁으로 주목할 곳이 합덕 전투이다. 합덕 전투는 제1차와 제2차 동학농민전쟁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면천 지역 농민군의 전투로 기록된다. 하지만 여러 곳에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실상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없다. 합덕 전투는 서산·태안 지역 동학 농민군의 대표적 전투인 승전곡 전투가 발생하기 직전에 일어났다. 즉, 『홍양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16일[양력 11월 13일]: 비도 수천 명이 합남 땅에 주둔하여 그 기세가 대단하여 관군을 보내어 토벌했다.

㉡ 19일[양력 11월 16일]: 관아의 돈 400냥을 풀어 목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덕산에서 연이어 급보가 와서 바로 200명을 징발하여 합남(合南)과 원평(院坪) 등지를 순찰했다. 예산현에서 비괴 유치교를 잡아왔다.

㉢ 20일[양력 11월 17일]: 신시에 합덕에서 첩보가 왔는데 다시 화약을 요청하여 1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운송하게 했다.

㉣ 21일[양력 11월 18일]: 관군이 합덕에서 진으로 돌아왔다. 비도 중에 총에 맞아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고, 사로잡은 자는 60여 명이었다. 이들을 5개 진영에 나눠 배속하여 일을 시키고 밥을 먹게 했다.

이 사실을 종합하면 1894년 10월 16일에서 21일 사이에 홍주목 합남면, 현재의 당진군 합덕읍에서 대규모의 동학 농민군과 관군과의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합덕 전투는 이창구가 홍주에서 처형당하기 며칠 전부터 전개되었다. 합덕 전투가 박인호의 덕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태안과 서산에서 기포한 박희인의 예포 농민군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승전곡 전투]

1894년 10월 21일 합덕의 동학 농민군이 홍주 관군에게 진압당하고, 다음 날인 10월 22일[양력 11월 19일] 면천의 동학 농민 지도자였던 이창구가 홍주목에서 처형당하면서 면천 지역의 동학 세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즈음 박희인이 이끄는 예포 농민군이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이들은 태안·서산·해미를 휩쓸었고 10월 23일[양력 11월 20일]에는 해미군 귀밀리에 유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24일[양력 11월 24일]에 여미벌[餘美坪][현재의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로 옮겨 주둔하다가 홍주로부터 파견한 관군과 전투를 전개하여 관군과 민보군을 대파했다. 때를 같이 하여 박인호가 이끄는 덕포 농민군도 해미 여미벌로 모여들었다. 결국 예포·덕포 농민군을 주축으로 내포 일대 농민군이 해미 여미벌로 집결한 것이다.

정부에서도 내포 지역 동학 농민군의 움직임을 매우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전봉준·손병희 연합 농민군이 10월 23일[11월 20일]부터 제1차 공주 전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고 있던 상태로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급히 경군과 일본군을 파견하여 내포 동학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홍양기사』에 의하면 “경군 50명과 일본군 100여명이 밤에 예산의 신례원에서 묵고 덕산과 대천을 경유하여 바로 면천으로 향했다.”라고 했다. 한편 박희인이 이끄는 예포 농민군이 여미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별유관 김경제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강공책을 택하여 태안 군수 신백희와 함께 해미·서산·태안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30여 명을 기습 체포하여 투옥했다. 그때는 9월 하순경이었다. 태안 지역의 동학군은 이러한 사실을 즉각 예산에 있는 예포에 전달했다. 마침 대접주인 박희인은 법소(法所)에 들어가고 없었다. 이들은 수일을 기다리며 상황이 악화되면 독자적으로라도 징을 울려 기포하기로 약속했다.

마침내 청산에서 9월 18일[양력 10월 16일]에 내린 기포령이 예산에 도착한 것은 9월 그믐날[양력 10월 28일]이었고, 태안의 동학 농민군은 일제히 무장 기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1일 사시[오전 9~11시]를 기하여 태안의 동학 농민군은 태안 관아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형 직전의 동학군들을 구출하고 동시에 태안 군수 신백희와 별유관 김경제를 현장에서 살해했다. 같은 시간에 서산도 동학군에 함락되었다. 동학 농민군 수천 명이 서산 관아에 들어가 동헌을 불태우고 서산 군수 박정기를 살해했으며 관인과 병부를 탈취했다.

그 후 태안과 서산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해미를 거쳐 해미의 여미벌에 집결하게 되었고 예포와 덕포의 연합 부대로 성장한 것이다. 이들은 10월 24일[양력 11월 21일], 1만 50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을 이끌고 인근의 승전곡(勝戰谷)[현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1개 소대, 관군 34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홍종식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수십만 동학군이 승산이라는 높다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을 나누어 먹이고 장차 행군할 것을 의논하는 중에 마침 한 장의 급한 보고가 오는데 홍주로부터 한일청 연합군이 막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죽지 않을 것을 자신하고 형세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만에 건너 산을 바라보니까 햇빛에 번쩍번쩍하는 것이 관군들의 칼 빛이겠지요. 처음은 가슴이 뜨끔합디다. 우리들은 수는 많으나 대개 죽창을 가진 농군들로서 ‘앞으로 갓! 뒤로 갓!’ 한마디도 못해 본 군사들이요. 저들은 새로운 무기를 가진 조련한 군사들이니 접전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도망을 하거나 싸우거나 죽기는 일반이니 기왕이면 눈 딱 감고 싸워 보자!’ 하고 일제히 고함을 치며 사면팔방으로 물밀듯 막 내려왔습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어느 겨를인지 우리들은 벌써 관군들의 시체를 타고서서 칼을 바꿔 차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화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를 보면 승전곡에는 이미 동학 농민군이 숙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관군과 일본군이 밀려온다는 연락을 비밀리에 받고 있었고,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은 매복 작전을 전개하여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인 아카마츠 소위의 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처음으로 총소리를 들었지만 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3분대를 승전곡(勝戰谷) 서쪽 고지로 내 보내고 적의 정황을 수색케 하고 지대는 전진을 계속했다. 첨병(尖兵)은 이미 전방 약 1,500m 앞에 있는 벌판에 10명쯤 되는 적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거리가 멀기 때문에 더 전진하여 승전곡 좁은 골짜기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이때 동학도 1명이 전진해 왔다. 이것을 산꼭대기에 있던 우리 병사가 저격하는 것과 동시에 4분대가 모여 있는 적에게 일제 사격을 퍼붓고 나머지 대원들도 서둘러 사격했다. 동학도가 허둥지둥 사방으로 흩어져 퇴각했다. 오후 3시 30분, 머리 위 산정에서 수천 명의 적군이 맹렬하게 사격해 왔으며, 게다가 서풍을 기화로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습격해 와, 그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오후 4시 산개해 있던 대원들을 순차로 퇴각시켰다. 그랬더니 오른쪽 고지의 적군이 전진, 공격했다. 그 기세가 맹렬했다. 마침내 승전곡의 좁은 골짜기로 일퇴 일지하여 면천으로 퇴각했다.”

일본군·관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 농민군은 면천과 덕산을 거쳐 홍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쫒아 면천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군으로부터 배낭 78개·상하 겨울 내의 78벌·휴대 식량 312식분·일대(日袋) 78개·군대 수첩 78개·깡통과 소금 각 78개·쌀자루 78매·밥통(飯盒) 78개·구두 78켤레 등의 노획물을 수거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에서의 첫 승리를 자축했다. 승전곡 전투는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 가운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다음 날 동학 농민군은 덕산 구만리로 진출했고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10월 26일[양력 11월 23일]에는 신례원 관작리에서 관군과 유회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한 동학 농민군은 28일에는 홍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홍주성은 관군, 일본군, 유회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관계로 동학 농민군은 성 밖에서 공방전만 벌이다가 진중이 와해되었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홍주성 전투는 내포 지역 동학 농민군의 최대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그 결과 농민군의 주요 세력은 붕괴되었고, 사실상의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11월 말경에도 동학군의 세력이 유지되었다고 하지만, 관군과 유림들은 유회군 조직을 적극 활용하여 동학 농민군의 검거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동학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과]

1895년 12월말 경, 동학군 진압은 거의 완료되었다. 정부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순무영을 폐지하고 해당 부대를 군무아문으로 복귀시켰다. 또한 각지의 의려(義旅)[의병(義兵)]와 유회(儒會) 등 민간인 진압 부대도 해산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학 농민군에 대한 과잉 진압을 경계하도록 하고 동학교도 가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유생층의 동학군에 대한 복수가 지속되었고 잔여 동학군의 일부는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는 사례도 있으나 동학 농민 혁명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진 지역과 내포의 동학 농민들은 지배층의 부정부패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여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당진 지역 일부 동학 농민들은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항일 의병’으로 전환하여 항쟁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1919년 당진 3·1 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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