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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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活貧黨 |
영어공식명칭 | Hwalbindang|Band of Hwalb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1900~1906년경 충청남도 당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의 무장 투쟁.
[개설]
조선 후기 이래 농민층이 분화되면서 많은 몰락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되었고, 그중 일부는 화적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900년경 충청도 내포 지방인 당진 지역에도 다수 출몰하면서 활빈당(活貧黨)을 자칭하였다. 이들은 양반과 부호를 협박하였고 5일장과 관아를 습격하면서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종종 일본인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1906년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함께 상당수가 의병에 편입되었고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활빈당은 19세기 횡행한 화적(火賊)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고, 1894년 갑오 농민 혁명이 종료되면서 귀향하지 못한 농민 세력도 가담했다. 1896년 의병 투쟁에 가담했다가 해산된 무장 농민 집단도 그 형태를 바꾸며 각지에서 출몰했는데 이들도 활빈당의 주축으로 참여했다. 활빈당으로 지칭되면서 활동한 시기는 1900년부터 1906년경까지이다. 이들의 활동 지역은 경기·충청·경상도 등 전국적이었으나, 충청도의 내포(內浦) 지방이 특히 치열했다. 1900년 겨울에는 바다로 진출하여 충청·경기 연안에서 수적(水賊)으로 활동했는데, 당진 연해안이 주요 활동지였다.
[경과]
활빈당은 해안을 왕래하는 상선을 약탈하기도 했고, 바다 연안의 부호가(富豪家)에 돌입하여 재물을 약탈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당진군 석문면 장고항에 이르러 재물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은 석문면 난지도에도 난입하여 ‘활빈당’을 자칭하고 곡식과 돈, 음식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석문면의 토호 세력이며 대지주였던 평산 신씨는 일정 기간 동안 고향을 버리고 서울에 올라가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육지에서의 활빈당은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관아를 습격했고 장시를 공격했다. 이들은 양반가의 묘지를 도굴한 뒤, 해당되는 양반에게 협박문을 보내 돈을 탈취하기도 했다.
[결과]
한말에 크게 발생한 활빈당의 활동은 단순한 화적떼의 민간인 습격이 아니고, ‘활빈(活貧)’이라는 명분을 드러냈다. 이들은 양반 지주층을 약탈함으로써 ‘반봉건’적 성향을 드러냈고, 적극적인 의적 활동으로의 변신을 꾀하였다. 또한 1906년 이후, 이들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라는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일부는 화적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다른 일부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조직하든지 혹은 평민 의병장 막하에 흡수되었다. 이와 같은 의병으로의 변화는 ‘반외세’로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활빈당은 조선 시대 말기에 출현했던 화적 집단이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하고, 다시 항일 의병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민중의 무장 투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