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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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九 |
영어공식명칭 | Yi Changg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학로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이창구 동학 농민군 봉기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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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94년 - 이창구 사망 |
거주|이주지 | 이창구 활동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면 월곡리 |
성격 | 동학농민군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학 접주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내포 동학 농민군을 이끈 동학 대접주.
[개설]
동학 농민 혁명은 조선 말인 1894년 국가적 위기와 신분적 불평등으로 고통받던 조선 민중들이 항거하면서 벌어진 대 사건이었다. 내포 지방의 동학 농민군도 대대적으로 봉기하였는데 면천의 대접주 이창구(李昌九)[?~1894]는 지금의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에서 봉기하였다. 이창구는 내포 지방을 대표하는 동학 대접주였다.
[가계]
『홍양기사』의 기록에 의하면 홍주 목사 이승우는 이창구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이창구가 투항하면 조정에 출사하도록 돕고 선봉장으로 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이창구의 신분은 출사가 가능한 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신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활동 사항]
1894년 10월 내포 지방의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이창구는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보령 오천에 있던 충청 수영을 수륙으로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충청 수사를 구타하였다. 1894년 10월 13일에는 송악산 농보를 점령하였다. 이창구가 수원 지역의 동학 농민군과 호응하여 송악산을 점령하고 조운을 통제하게 되자 내포 지방 여러 군현이 거둬들인 공세미가 조정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외무 대신 김윤식은 일본 공사관에 편지를 보내 수원에 있던 일본군을 급파하여 내포의 이창구를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하였다. 홍주 목사 이승우는 첩을 이용한 미인계로 이창구를 사로잡아 홍주에서 처형하였다.
『홍양기사』의 기록에 의하면 양호 순무사 정경원이 고종의 명을 받고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님]을 전하고자 내포 지방을 대표하는 동학 접주들을 홍주 관아로 불러들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내포 지방의 동학 접주들 가운데 이창구가 이끄는 동학 조직이 5~6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가장 막강했다고 한다. 이창구는 내포 지방을 대표하는 대접주로 조정에서도 동정을 파악할 정도였음은 도순무사 신정희가 좌선봉 이규태에게 보낸 편지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