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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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師城隍行次 |
영어음역 | Guksa Seonghwang Haengcha |
영어의미역 | Guksa Village Tutelary Festival Procession |
이칭/별칭 | 국사서낭행차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강릉단오제를 지내기 위하여 매년 음력 4월 보름과 5월 3일 두 차례 행하는 대관령국사성황의 행차
[개설]
국사성황행차는 매년 강릉단오제를 지내기 위하여 두 차례 행하게 된다. 먼저, 매년 음력 4월 보름이면 강릉 사람들은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대관령에 가서 단오신인 국사성황신을 시내 여성황사에 모셔 온다. 강릉 사람들은 이 날을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혼인한 날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관령 산신제와 대관령 국사성황제를 지내고 무녀와 신장부들은 산에 올라 신목을 찾는데 신이 강림했다고 믿는 신목을 찾아 제금소리와 함께 신목을 베고 나면 사람들은 신목에 예단을 걸고 소원성취를 빈다. 그런 다음 성황신의 위패와 신목을 앞세우고 제관, 무당, 시민들이 행렬을 이루고 일행은 신명나는 무악을 울리면서 대관령을 내려온다.
구산 서낭당에 들러 굿 한마당을 하고 행차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구산 주민들이 마련한 음식으로 요기를 한다. 행차는 다시 차량으로 학산 서낭당에 간다. 학산은 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가 탄생한 곳으로 단오신이 고향을 방문하는 의미이다. 학산에서도 역시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제물로 굿 한마당을 벌이고 시내를 돌아 홍제동 국사여성황사에 봉안제를 올리고 단오 무렵까지 여성황신과 함께 모셔 진다.
두 번째 행차는 음력 5월 3일이 된다. 국사여성황사에 올라가 영신제를 지내고 여성황의 친정으로 알려진 경방댁에 들렀다가 저녁 7시경 명주초등학교에서부터 오거리-중앙시장 등 중심가를 지나 단오장에 마련된 임시제당에 모셔진다. 이 행차를 영신행차라고 하며 농악대가 신명을 돋우고 수많은 시민들이 등불을 들고 뒤를 따르면서 축제 분위기를 만든다. 굿당에 위패와 신목을 모셔놓은 뒤 무녀들이 환영의 춤을 추는 것으로 영신 행차는 끝이 난다.
이 때 행차는 가장 앞에 옛날 관청에서 만들었다는 화개(花蓋)를 앞세우고, 제관, 무당, 「관노가면극」, 농악, 시민들이 뒤따른다. 행차 시 단오행진곡 또는 단오신가(神歌)로 「영산홍」이라는 지역의 민요가 불려진다.
[명칭유래]
강릉단오제에 모셔지는 중심신은 범일국사이다. 범일국사를 영동 지역 사람들은 '대관령국사성황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매년 단오제를 치르기 위해 대관령에 가서 국사성황신을 시내로 모셔오고 다시 단오장으로 모시는 행차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국사성황행차라고 부른다.
[연원/변천]
기록에 의하면 강릉은 옛 동예(東濊)의 땅으로 예국(濊國)에서는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축제를 행하였는데, 무천이 추수 감사제의 성격이라면, 5월 단오는 상대적으로 곡물의 성장 의례적 성격을 띠는 축제이다. 이렇게 볼 때 강릉단오제의 역사는 천년에 이르는 것으로 짐작된다.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에 영동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3·4·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을 맞이하다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등에 보면 고려 태조를 도와 왕순식이 신검을 토벌하였는데, 이때 태조가 왕순식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감응이다하니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大峴)[대관령]에 이승사(異僧祠)가 있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상감께서 보신 꿈은 이것입니다라 한데서도 대관령과 강릉단오제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603년 강릉 출신 허균에 의해 이루어졌다. 허균은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고 기록을 남겼는데 강릉단오제에서 제사를 받는 대상이 ‘김유신(金庾信)’이라고 썼다. 어려서 김유신은 명주(溟洲)에 유학하여 무술을 익혔다. 삼국을 통일한 뒤 죽어서는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고, 이 신이 영험하여 해마다 5월이면 대관령에 가서 신을 맞이하여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우면 풍년이 들고 신이 노하면 천재지변을 주어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며 서로 경사스러운 일에 참여하여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오늘날 강릉단오제의 축제적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어 그 역사를 짐작케 하지만 국사성황신에 관한 언급은 없다.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에는 더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매년 4월 보름에 향리의 호장(戶長)이 무당들을 거느리고 대관령에 올라가 신목을 베어 모시고 마을로 내려온 후, 단오가 되면 무당패가 굿을 한다고 했는데, 그 내용이 오늘의 단오제 풍경과 거의 같다. 역시 굿을 하지 않으면 비바람이 곡식에 피해를 주게 되고 금수의 피해도 있다는 것이다.
예부터 강릉단오제는 민중이 중심이 되어 행하되 관청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민관공동의 축제였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단오제에서는 강릉시장을 비롯한 기관장들이 제관직을 수행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강릉단오제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 고대 제의의 축제적 모습이 온전히 살아 있는 축제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당은 목조와가 맞배지붕 3칸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관령에 있다. 가운데 후면 벽면에 서낭신상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는데 현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평상시 국사성황신은 위패로 이 그림 아래 단위에 모셔진다.
그리고 강릉단오제를 치르기 위하여 국사성황제를 지내고 나면 단오제가 끝날 때 까지 신체는 신이 내린 단풍나무 신목으로 존재한다.
[절차]
국사성황행차의 전후에 각각 제례가 배치되어 있으며 행차에는 성황신의 위패와 신목을 앞세우고 제관, 무당, 시민들이 행렬을 이루고 일행은 신명나는 무악을 울리면서 행진한다.
[현황]
강릉을 기록한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성황신을 모시러 가는 행차는 아주 장관이었다고 한다. 나팔과 태평소, 북, 장고를 든 창우패들이 무악을 울리는 가운데 호장, 부사색, 수노(首奴) 등의 관속, 무당패들 수십 명이 말을 타고 가고 그 뒤에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고개를 걸어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요즘은 대관령 길을 차를 타고 올라간다. 시민들은 옛 시청 앞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버스를 타고 대관령에 올라가 산신제와 국사성황제에 참여하는 풍속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관령 정상에서 북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 산신당과 성황사가 있다. 산신제는 유교식으로 모신다. 이어 대관령국사성황신위를 모시고 행하는 성황제에서는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아 민관이 합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주관자는 강원도 강릉시 노암동 722-2번지 소재의 강릉단오제보존회이다.
[의의와 평가]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역사 전통 축제이다. 축제의 한 부분을 이루었던 국사성황행차는 오늘날 거리 축제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현대적 축제가 아닌 전통 축제에서 시민이 함께하는 참여의 장으로 진행되는 한국적 퍼레이드라고 할 것이다.